짤막한 정신과 내원기
몇 개월 전부터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심리 상담도 받아봤고, 집에서 마음 치유에 대한 책들을 읽고, 일기를 쓰고 직접 우울의 수기를 쓰고, 가끔씩 발작적으로 울면서 감정을 뱉어냈다. 소리 지르면서 화내고 우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잠을 설친 다음날에 정신이 피폐해지는 경우도 거의 줄어들어서, 나는 내가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아니, 사실 괜찮아진 건 맞다. 2년 전의 내 상태와 약 먹기 전의 상태를 비교해도 정말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약을 먹어야 할까? 이제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거 같은데 계속 지금의 상태라면…. 조금씩, 정신과를 내원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내 안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만큼 쉬었으면, 이만큼 내 마음에 여러 심리적 자원들을 부었으면, 이만큼 안전하다 느꼈다면 나도 이제 ‘일반인들의 속도’로 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작 내가 상정한 그 ‘일반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진 모르겠다만.
초조해졌다. 한 번 더 사력을 다해 살다가 부서지면 그 뒤엔 정말 내가 잘못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계속 집에서 옹송거린 채 제자리걸음만 하는듯한 내가 답답한 마음. 두 가지가 번갈아가며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트라우마 버튼이 아주 제대로 세게 눌릴 일이 생겼다. 나는 또 엄마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울고 화를 냈다. 맙소사, 2년 전도 아니고 4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이 끔찍했다. 4년 전의 서러움이 아직도 응축된 채 풀리지 않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차에 치이는 나를 상상했다. 끔찍했다.
며칠간 계속 감당 안 되는 우울과 분노가 이어졌다. 그 시기 몸이 안 좋았던 것도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한몫했다. 나는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정신과를 몇 군데 알아보고 전화를 했다.
그중 한 군데에 직접 들렀다. 상담센터 대기실에 처음 가 앉았던 때가 떠올랐다. 아는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지금 정신과 왔는데 그냥 돌아가고 싶어. 언니는 기껏 갔으니 시원하게 진료받고 오라고 했다.
정신과의원에선 진료 대신 면담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첫 면담에서 나는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은 적이 있고, 여전히 우울증이어서 낫기 위해 약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우선 언제부터 우울했고 무슨 일 때문에 우울한 것 같은지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간단히 물었다.
처음엔 대학원 얘기를 했다가, 점점 어릴 때 장면들로 얘기가 흘러갔다. 펑펑 울었다. 이제 몇 번이고 내뱉은 말이라 이 얘기를 하면서 남 앞에서 더 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눈물이 줄줄 났다. 눈앞의 티슈를 뽑아 썼다. 내 얘기를 듣던 선생님은 최근에 생긴 우울이 아니라 전부터 있던 깊은 우울이고, 불안도도 높아서 약을 먹는 게 맞다고 하셨다.
사람이 열이 날 때 그 원인이 전날 맞은 비라면, 원인은 원인이고 우선 열부터 내리게 약을 먹는 거라고. 그 열을 내려주는 게 정신과 약의 역할이라고 했다. 상당히 인상 깊은 말이었다. 면담을 끝내고 나오는데 문을 다 닫기도 전에 의사 선생님이 바로 내 뒤에 접수한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여기가 상담실과 정말 다른 곳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정신과에 처음 발 들였을 때는 마음이 불편했는데, 울고 나니까 뭔가 시원했다. 힘든 일을 한 내게 장하다는 의미로 마침 눈에 보인 아이스크림 체인점에 들어가 파인트 한 컵을 샀다. 민트초코, 고구마 맛, 과일 맛이 나는 샤베트, 그리고 딸기맛 아이스크림. 집에 가서 맛있게 나눠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 가게에 흘러나오던 음악이 아이유의 <라일락>이었는데, 그것도 좋았다. 주문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동안 그 곡을 들으며 기다렸다. 내 부은 눈을 보고 조금 당황한 듯했던 가게 직원분에게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말하고 나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엄마랑 싸웠다. 사소한 걸로 시작해서, 엄마가 진작에 상담이라도 갔으면 내가 정신과에 들를 일은 없었을 거라고 소리 지르면서. 사실은 내가 결국 정신과에 갔다는 게 마음 한구석으로 억울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