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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라이언 Apr 13. 2021

팀장님! 유치원생 관점에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용자의 시선과 관점에서 글쓰기


모 벤처회사에 합류한 지 3년이 조금 넘은 2010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난 회사에서 홍보와 마케팅을 총괄하면서 동시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와 관련하여 홈페이지와 공식 채널(블로그 등)에 글을 쓰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회사는 모 IT기업에 투자를 받았고 투자한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좀 더 업그레이드된 서비스를 구성하는 차원에서 투자회사로부터 유명한 기획자가 우리 회사에 파견을 나와 있었다.


그 기획자분은 나보다는 2살 나이가 많은 누님이셨고, IT회사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꽤 많은 서비스를 기획하여 대박을 낸 참 능력자였다. 당시 우리 회사에는 서비스 기획자가 따로 없었고 조금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었기에 투자회사 입장에서는 유능한 기획자가 붙으면 서비스 확장에 좀 더 탄력을 받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회사에 파견을 나온 기획자 누님은 유능한 기획력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금융 서비스라는 생소한 사업 분야에 대해 충분한 사전 지식과 경험이 없어 설립 초창기부터 합류한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고 회의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나 역시 우리 회사에서 가장 부족했던 기획자, 그것도 아주 유능한 기획자가 합류하였다는 것에 너무 흥분되었다.


그렇게 그 기획자 누님과 나의 시너지를 무척 기대했는데......


시너지는커녕, 시작부터 잦은 의견 충돌이 발생했고 약 1년여간 회의 자리에서 수 차례 언쟁이 있을 만큼 충분한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서로 언쟁할만한 이슈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입장에서는 3년 넘게 우리가 하는 서비스만 생각하고 달려온 우리의 노하우를 무시하고 단지 기획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누님의 태도에 순응할 수 없었고, 누님의 입장에서는 좀 더 기획의 틀을 입혀서 멋있고 정교한 서비스를 만들려고 했지만 정작 서비스 자체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일종의 자존심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벤처회사의 초창기 멤버로서 세상에 없던 서비스를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고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나름 고생을 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나와 우리 회사를 상대로 파견 나온 기획자가 너무 고집스럽게 구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pixabay


한 번은 그 언쟁이 극에 달한 적이 있었다.

난 언론 보도자료를 배포하기 전에 내가 작성한 보도자료를 매번 직원들에게 공유를 해준다. 우리 회사에 최근에 이런 이슈가 있었고 이런 내용으로 기사를 내려고 하니 참고하라는 차원의 공유이고, 사전에 대표님의 최종 승인을 받은 후에 공유를 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이런 보도자료를 공유하고 나서 피드백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기획자 누님이 메일로 "이런 부분은 이런 문구로 좀 바꿨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보내온 것이다. 그것도 전체 회신으로!


난 순간 화를 참지 못했고, 이렇게 회신을 보냈다. (물론 나도 전체 회신으로 말이다.)


"충분히 생각하고 여러 번 수정하면서 오랜 시간 작성한 보도자료이고 대표님의 최종 확인도 받았습니다. 제가 보도자료를 공유해 드리는 것은 피드백을 달라는 의미가 아닌, 참고하라는 의미입니다!"


홈페이지에 반영되는 서비스 페이지에 대해서는 기획자의 손길이 필요하기에 그럭저럭 합의하는 차원에서 지나갔지만, 보도자료까지 본인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수정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에 순간 화가 나서 나 역시 일종의 반격(?)을 한 것이다.


그날 한 반나절 동안은 회사 내에 정적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직원들이 그 메일을 읽었기에 어느 정도 두 사람의 기싸움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원들이 알게 된 것이다. 나 역시 너무 흥분한 나머지 외근을 나간다는 핑계로 노트북을 들고 회사를 나와버렸다.


@pixabay


그 일이 있은 후 한 3일이 지났을 무렵. 기획자 누님의 메일을 한 통 받았다.


"팀장님, 오늘 퇴근하고 약속 없으면 저녁 식사 같이 하실래요?"


저녁 식사가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 일이 있은 후에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게 부담스럽고 이래저래 맘이 편하지 않았기에 그냥 그 누님이 사과를 한다면 받아줄 생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서로 서먹서먹한 그런 저녁 식사 자리를 맞이했고, 그 자리에서 누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 제가 메일로 보도자료에 대해 의견을 드렸는데 생각해보니 제 생각이 짧았네요. 팀장님이 충분히 많이 생각하고 쓴 보도자료인데 제가 전 직원들이 보는 메일을 통해 팀장님을 너무 무안하게 만들었어요. 기획자의 습성이랄까요? 아마 그런 것 때문이었나 봐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사과를 원했지만 정작 이런 사과를 받고 보니 무척 무안해졌다. 동시에 기획에 대해서는 본인의 곤조를 꺾지 않았던 누님이기에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누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팀장님. 저는 이제 한 달 후면 다시 본사로 복귀합니다. 제가 떠나는 입장에서 팀장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팀장님은 글을 참 잘 쓰세요. 회사 초창기 멤버로서 이 회사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모습도 볼 수 있고요. 그런데 말이죠. 팀장님의 글은 어떤 면에서는 어렵게 느껴집니다. 전문지식이 많은 기자들이나 이 서비스를 이미 이용해 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어려운 글이 아니지만, 이 서비스를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무척 어렵게 느껴질 겁니다."


사과는 일종의 연막작전이었던가?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누님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팀장님. 유치원생들의 관점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유치원생들에게 이 서비스를 소개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고객층이 2~30대 그리고 40대 직장인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이 서비스를 좋아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2~40대 직장인들도 우리가 원하는 지적 수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무엇보다 요즘 정보의 홍수시대에 우리 서비스를 한 번에 이해하도록 만들려면 더더욱 쉽게 간결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제가 종종 팀장님과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은 그런 차원이었습니다."


잠깐 머릿속이 멍해졌지만 이후 식사하는 내내 조금은 불편한 자리가 계속되었고 그렇게 서로 애매하게 사과를 나누고 내일부터는 잘해보자고 인사치레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난 지금까지 내가 만들었던 보도자료와 서비스 페이지의 콘텐츠 문구, 그리고 회사 블로그 콘텐츠를 모두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순간 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기획자 누님의 말이 맞았다. 내가 만든 대부분의 콘텐츠는 우리 서비스를 알거나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들과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끔 고객센터로 회사 서비스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홈페이지에 표현된 문구들이 그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표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순간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고 밤새 잠을 뒤척였다.


그 기획자 누님은 그날 저녁 식사 이후 20일 후에 다시 본사로 복귀했고, 그 후 약 1년간 내가 누님의 자리를 대신했다. 누님이 기본적인 기획의 틀은 모두 잡아놓았기에 약간의 살만 붙이면 되는 것이었다. 누님이 본사로 가고 나서 대표님께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약 2주일 정도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 홈페이지의 콘텐츠를 좀 수정하고 싶어요. 전반적으로 우리 운영자 입장에서 콘텐츠가 구성된 것 같습니다. 제가 사용자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좀 더 고민해 보고 쉽고 간결한 언어로 바꿔보도록 할게요."


대표님도 내 의도를 이해하셨는지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고 그렇게 서비스 페이지의 콘텐츠를 전반적으로 수정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나의 글쓰기는 참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려운 용어는 최대한 배제하고 쉽고 간결한 용어를 쓰되 전체적인 글의 분량은 길지 않게. 대신 임팩트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렇게 글쓰기 습관이 변해갔다.  


@pixabay


요즘 UX Writing이라는 용어를 많이 접한다. UX는 User eXperience로 사용자 경험을 의미한다. 즉 사용자 입장에서, 사용자 친화적인 글쓰기가 바로 UX Writing인 셈이다.


UX Writing에 대한 설명과 실제 서비스 결과물들은 이미 많은 자료들이 공개되어 있기에 이에 대해서는 생략하려 한다. (개인적으로 토스 블로그를 참고해 볼 것을 권한다. 토스가 금융을  쉽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 UX Writing )


나 역시 아직까지 UX Writing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획자 누님이 했던 말인 거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유치원생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이 글을 읽는다는 생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 이것이 UX Writing의 시작이자 기본이 아닐까?


UX Writing이라는 용어도 없었던 2010년에 나에게 이 큰 가르침을 주신 기획자 누님이 참 많이 보고 싶다.


누님, 하늘에서 행복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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