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봄이라는 말을 쓰시나요?
한겨울, 한여름은 있는데 왜 한봄 한가을이라고는 안 할까 생각하다 찾아보니 한봄이라는 말은 실제로 있었다. 봄이 한창인 때. 한봄.
여름과 겨울에 비해 기간 자체가 짧기 때문에 초봄, 한봄, 늦봄으로 부러 나누지 않는 탓이겠지만, 사실 나에겐 여름 겨울보다도 봄이 더 잘게 나눠져 있다. 초겨울과 늦겨울은 차이가 크지 않다. 나무는 앙상하고, 공기는 차다. 아마 기온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봄은 다르다. 봄은 시작과 동시에 바쁘게 움직인다. 공기의 온도 살짝 올리고, 꽃봉오리부터 틔우고 꽃 피워내고 또 지고 그다음 그 자리에 이파리 돋아내고.. 헥헥... 바쁘다 바빠. 그래서 봄에는 시간의 흐름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눈 깜짝할 사이 휙휙 변하는 봄을 따라가려다 보면 미처 다 쫓아가지 못한 마음이 붕- 뜬다. 그래서 사람들이 변화가 빠른 봄과 가을을 타는 건가.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봄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1. 최초로 봄 냄새가 나는 봄
봄은 냄새로 가장 먼저 찾아온다. 아직 패딩을 입어야 하는 날씨지만, 코끝에 어제와는 다른 따뜻한 공기가 느껴지는 순간 '봄이다!'를 외치게 된다. 누가 뭐래도 그때부터 나의 봄은 시작된다. 설레서 봄옷을 꺼내 입다가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그래도 나는 덜덜 떨면서 봄옷을 입고 다닌다.
2. 꽃봉오리 맺힌 봄
초봄. 곧 엄청나게 사랑받을 준비를 하는 꽃봉오리를 보는 것도 기쁘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앙상했는데 어느새 초록빛 새순을 틔운 나뭇가지도 기특하다. 이때쯤엔 먼저 핀 산수유와 매화를 볼 수 있다. 동네마다, 심지어는 나무마다 속도가 달라서 어떤 나무는 이미 펴있는 반면 어떤 나무는 아직 겨울이다. 아직 꽃들이 만개하지 않았기에 꽃이 귀해서, 길 가다 꽃을 보면 홀린 듯 그 앞으로 가서 몇 분 서 있는다. 언제 폈어. 어제는 못 봤단 말이야. 정말 하루아침만에 폈어. 괜히 말도 걸게 된다. 어젯밤 들어갈 땐 피지 않았던 다음날 아침에 피어있는 경우도 있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밤새 꽃봉오리 앞에 서서 피는 거 지켜보기다.
3. 꽃이 만개하는 봄
한봄에는 망각의 동물로 태어난 게 감사해진다. 매년 보는 꽃인데 왜 매번 처음 본 사람처럼 감탄하게 될까? 집 앞 벚꽃길을 10년 넘게 걸어도 매년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와 가족도 모두 나와 같은 망각의 동물이라 매년 똑같은 이유로 또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것도 한봄의 특권이다.
이 시기에는 외출을 하다가도 우뚝 서서 꽃구경을 하게 된다. 하여간 봄엔 지각할 위험이 더 커진다. 꽃을 보려고 10분 더 일찍 나서는 그런 계절이다.
4. 꽃 지는 봄
사실 나는 꽃 지는 봄을 가장 좋아한다. 대체 언제 돋은지도 모르겠는 푸르른 잎사귀가 온 동네에 흐드러지기 시작하는 것도 좋고 벚꽃 잎이 흩날려 바닥이 하얘지는 것도 좋다. 부스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어느 꽃 지는 봄에는 부서진 보도블록 사이로 벚꽃 잎이 한가득 쌓여 보도블록을 메꾼 장면을 포착했다. 부서진 곳은 채워질 수 있구나. 오목한 마음을 구태여 미워할 필요는 없구나. 그런 걸 꽃 지는 봄에게서 배웠다. 무엇보다도 꽃잎과 나뭇잎이 한데 섞여 있는 게 좋다. 자연의 과도기는 늘 옳기 때문에.
한봄이라는 단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므로 위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초봄 / 한봄 / 늦봄이란 걸 이젠 안다. 그럼에도 나는 봄을 나누기 위해 구구절절을 택할 것이다. 봄은 찰나기 때문에 그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면 봄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최대한 세세히 말해야 한다. 알고 나면 그만큼 볼 수 있는 법이니까.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안 보면 놓칠 봄의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치길 바란다.
내가 봄에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