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더너도 에누리를 할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첫 편지라 조금 어색하고 떨리네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이곳 런던의 당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갑자기 웬 당근인가 싶겠지만 먹는 당근 말고 하는 당근을 말하는 겁니다. 왜냐면 어제 드디어 처치 곤란으로 방 한 켠에 짱박혀있던 매트리스 토퍼를 해치웠거든요.
타지 생활을 하다 보니 옷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물건들은 저를 지나쳐 가는 것들입니다. 그중에는 이사를 하면서 침대 사이즈가 달라져 한순간에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 매트리스 토퍼가 있는데요, 거금을 주고 구입해 얼마 사용하지도 않은 물건을 냅다 버리기엔 아까워서 내내 보관만 해두다가 영국의 중고나라를 찾아봤습니다.
영국에서는 중고거래를 할 때 '검트리 Gumtree' 라는 앱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매물을 올리기 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올린 매물들을 보고 능숙해 보일 수 있는 몇 가지 영어 표현들을 익혔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에누리 불가', '택포', '풀박'과 같은 중고거래 전문용어들이요. 그리고 한국에서 쌓은 당근 경력을 살려 예쁘게(근데 이제 허위매물처럼 보이지 않도록 현실감을 곁들인) 사진을 찍어 업로드했습니다.
매트리스 토퍼가 부피도 크고 가격도 조금 있어서 그런지 바로 반응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아직 가능한가요? Is this still available?" 라는 소위 찔러보기 메시지가 오긴 했지만요.
그렇게 매물을 올리고 며칠이 지났을까요, Paul이라는 사람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간 잦은 찔러보기에 신물이 난 터라 자동 응답기처럼 yes it is 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금방 답장이 왔습니다. 오 이번엔 뭔가 되려나 싶어 기대하고 대화창을 열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에눌 가능? What's your best price?"
네. 에누리에는 국경이 없더군요. 런더너도 결국 같은 사람이니까요. 제가 있는 곳까지 가지러 오신다는 말에 택배비 정도를 깎아드렸고,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서로를 확인할 때 "당근이세요?"라고 묻는데 영국에서는 어떻게 확인하는지 궁금했거든요, (아 물론 저의 경우 길 한복판에서 거대 마시멜로우 같은 토퍼를 들고 있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만요.) 결론은 그냥 "Hi"였습니다.
아무튼 한결 후련한 밤입니다. Paul에게도 만족스러운 거래였길 바라며... 막상 쓰고 보니 별거 없는 것 같아 조금 머쓱하네요. 한국에는 비바람이 분다던데 모두 안전하고 즐거운 연휴 보내시길 바라요.
그럼 당신의 행운을 빌며.
수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