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라불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Nov 04. 2022

아버지의 아침 일기

쉽고도 어려운 글


   지은 지 사십 년이 넘었다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로운 모습부터 떠올리겠지만, 부모님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다행히도 빗물이 샐 만한 작은 틈 하나 없이 튼튼하다. 게다가 지난봄, 외벽外壁을 깨끗이 새로 칠한 덕에 아파트의 정확한 건축 연도를 알려주면 깜짝 놀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파트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그 시절, 건축비를 아끼지 않고 제대로 지었기 때문이라며 아버지는 감탄과 자랑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곤 한다. 돈 냄새를 맡은 건설업자들은 재건축, 재개발을 나름 줄기차게 권하지만,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그것을 반대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는 변함없이 튼튼하지만 여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들의 평균 연령을 알고나면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주민 대표를 맡고 있는, 가장 젊다는 분의 연세가 이미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하니 정답을 가늠하기란 꽤나 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른 새벽, 아파트 마당으로 구급차가 들어오는 일이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늘었다. 며칠 전 아침에도 그랬다. 


   운동을 하러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뒷베란다에 서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란스레 번쩍이는 구급차의 경광등이 얼핏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한데 섞여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현관문을 조용히 열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구급차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몇몇 젊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양복 차림에다 저마다 노란 상주喪主 완장을 팔에 찼다.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던 이웃 어르신이 별세하신 것임을 그날 저녁 엄마에게서 들었다. 아버지가 올해 여든 넷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베란다 탁자에서 메모 한 장을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였다. 꾸준히 써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몇 월 며칠’로 시작하고 있으니 일기인 듯싶었다. 들킬까 봐 얼른 사진부터 찍었다. 


10月 31日 월요일 아침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좋은 친구 만나서 좋은 이야기하고, 좋은 음식 먹으면서 웃는 얼굴 마주 보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자.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일까. 내가 좋으면 모든 친구가 다 좋다. 어떤 음식이 맛이 있을까. 배가 고프면 모두 맛이 있겠지.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일까. 잘 들으면 모두가 좋은 말이 아닐까? 모든 일들이 모두 내게 있겠지. 좋은 친구도 내가, 좋은 장소도 내가, 좋은 음식도 내가, 좋은 이야기도 내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살이, 웃으며 지내도 부족한 세월. 억지(로)라도 웃으며 살다가 떠나리라. 친구여 내일 또 웃으면서 다시 만나자. 잘 자거라.


   글에 담긴 아버지의 심정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었다. 아침에 쓰는 글임에도 내일을 먼저 말하고 있으니, 분명히 ‘잘 자거라’인데 자꾸만 ‘잘 가거라’로 읽혔다. 그렇게 읽은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나의 감정과잉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여든 넷의 아버지가 쓴 짧은 일기, 그 쉽고도 어려운 글 때문에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거라가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 Image by Daniel Nebreda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표절의 역사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