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이, 이 못된 가시나야. 니가 내한테 이랄 수는 없는 기다. 이때까지 내가 니한테 얼마나 잘해줐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한테 이란단 말이가? 이래선 안 되는 기다. 지난번 대청소 시간에 니가 힘들까 봐 그 무거운 책상들도 내가 전부 다 옮겨줐고, 봄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할 때, 별 세 개 찍힌 종이를 니 앞으로 슬쩍 밀어준 것도 바로 내다. 그걸로 공책을 세 권이나 받았다 아이가? 그런데 니가 내를 이렇게 무시한다고?
니 치마 입고 오던 날, 그래 맞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그 예쁜 치마 말이다. 그거 입고 오던 날, 대관이가 아이스케키 할라카는 걸 죽기 살기로 막은 것도 내다. 어데 그뿐이가? 더 말해주까? 뭐라꼬? 묘숙이? 나는 묘숙이한테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묘숙이 지 혼자 내를 좋아하는 것뿐이다. 내한테는 니 밖에 없다. 그런데도 니는 내한테 이라나? 진짜로 이라믄 안되는기다.
좋다, 두고 봐라. 내가 어떻게 복수하는지, 현수랑 희정이, 너거 둘 사이를 내가 어떻게 훼방 놓는지 똑똑히 보란 말이다, 알겠나?
희정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이었다. 복숭아처럼 뽀얀 피부에 반달 같은 눈썹, 반짝이는 두 눈 사이로 콧날이 오뚝했다. 도톰한 입술은 딸기만큼 붉었고, 그래서인지 두 볼도 언제나 발그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끝에는 패션의 정점을 찍는 방울 두 개가 늘 기분 좋게 딸랑거렸다.
정말 운 좋게도 삼 학년에 이어 사 학년 때 역시 희정이와같은 반이 되었지만 그 말은 곧 수많은 경쟁자들 또한 여전했다는 뜻이다. 희정이를 두고 애들끼리 주먹다짐을 벌였다는 일은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 무식하게 싸움질이라니.
천박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명수와 현광이를 불러 모았다.
“너거도 알다시피 희정이는 내 꺼다. 그렇다면 너거가 뭘 해야 할지 잘 알제?”
충실한 두 날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현광이는 희정이의 주위를 맴돌면서, 애써 꾸며낸 선행善行을 슬쩍슬쩍 흘렸고, 명수는 풍문을 가장한 나의 싸움 실력을 희정이에게 전달했다.
“지난주에 진우가 길 잃은 할머니를 도와주고, 목줄이 풀린 도사견 두 마리를 맨 손으로 때려잡았다 하더라.”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어쩌다 오른팔과 왼팔의 충성 경쟁이 과해지는 날엔, 도사견을 도와주고 할머니를 맨 손으로 때려잡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숱한 무용담과 미담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희정이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나를 향해 그래도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려 웃어줄 만도 한데, 아이스 나라의 크림 공주는 언제나 한결같은 냉랭함 그 자체였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난공불락의 성城 앞에서 나를 비롯한 연산동 하이에나들은 하릴없이 그저 답답한 속만 태울뿐이었다.
그해 오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희정이의 짝이던 창수가 갑자기 전학을 가면서 그 자리가 비게 된 것이다. 창수 뒤에 앉았던 내가 한 칸 앞으로 당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럴 수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느님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셨구나. 감격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현광이와 명수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신이 나서 몸부림까지 쳤다.
하루 종일 선생님의 이동 지시와 확인 선언만을 기다렸다. 선생님, 제발 이렇게 말씀해 주세요, 네?
“자, 진우는 앞자리로 옮기도록. 그리고 오늘부터 진우가 희정이의 짝이니까 다른 놈들은 절대 쳐다봐서도 안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오후에 현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전학을 왔으며 심지어 서울에서라고 했다. 창수가 떠난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현수가 앉게 되었고, 현수는 당연히 희정이의 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둘은 금세 친해졌다. 현수와 희정이는 피부가 하얀 것도 비슷했고, 고급진 옷을 입은 것도 닮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수에게는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궁극의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서울말’이라는 것이었다. 불쌍한 희정이는 현수의 서울말에 금방 중독되고 말았다.
“차현수, 니는 말투가 참 곱네? 영화배우들이 쓰는 말과 똑같다 아이가.”
“아냐, 희정이 네가 좋게 들어줘서 그래.”
희, 희정이? 김희정이 아니라 희정이?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른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얼레리 꼴레리였다. 그러나 현수는 아이들의 비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시도 때도 없이 희정아, 희정아 하며 느끼한 서울말을 날려댔다.
다정스레 나누는 사랑의 밀어密語를 바로 뒷자리에서 듣고 있자니 나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희정이와 현수는 슬쩍슬쩍 팔이 닿기도 하고, 모르는 문제를 알려준다는 명목으로 책상 위 삼팔선을 제멋대로 넘나들기도 했다. 시험 문제를 일찍 풀고 나면, 책상에 엎드려 서로를 쳐다보며 두런두런 속삭일 때도 있었다.
내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도 싶었다. 그래도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현수가 이사 온 곳은 희정이네 바로 옆집이었다. 학교에서의 모습도 보기 싫은데, 아침저녁으로 둘이 나란히 다니는 꼴까지 보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믿음직스러운 책사 제갈 명수와 공명 현광이 나를 위해 꾀를 냈다. 희정이의 책상 안에다 개구리를 집어넣은 다음, 그것을 현수 짓으로 몰아가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현광이는 이왕에 그럴 거면 개구리보다 뱀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뱀은 어디서 구해? 이것들을 책사라고. 악어를 데려오자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희정이와 현수 사이를 떼어 놓으려는 우리의 계략은 언제나 헛헛한 한숨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그 묘수가 떠오른 것이었다.
평소보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텅 빈 복도가 삐그덕 소리를 냈다.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교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교탁 앞으로 다가가 분필 통을 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움큼을 집어 들었다. 서걱거리는 분필의 느낌이 전에 없이 좋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두고 보자, 김희정, 차현수.
곧장 운동장 뒤편 창고 옆으로 갔다. 그곳은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기놀이를 하거나 고무줄을 뛰는 곳이었다. 넓적한 담벼락이 있었고 거기에다 누구라도 잘 볼 수 있도록 제대로 쓸 작정이었다.
[사 학년 육반 김희정은 임진우를 좋아한다]
누나가 읽던 책에서 외국의 어떤 박사님이 그랬다. 백번만 반복하면 내 것이 된다고. 김희정, 김희정, 정확하게 백 번을 되풀이했다. 박사님은 또 그랬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종이에 쓰면 된다고 했다. 박사님이니까 믿어도 된다. 종이보다 담벼락은 훨씬 크니까, 효과도 무지하게 클 것이다.
담벼락 앞에 섰다. 분필 서너 개를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숨을 한껏 들이쉬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쓰기 시작했다. 분필이 하얀 가루를 날리며 담벼락에 묻어났다.
사, 학, 년, 육, 반, 김, 희, 정, 은, 임, 진, 우, 를, 좋.
정확하게 ‘좋’까지 단숨에 썼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 여러분들이 그러실지도 모르겠다. 제발 꾸며내지 말라고. 아니다. 맹세코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내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그때 일을 굳이 거짓으로 지어낼 필요가 있을까? 분명한 사실이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 글자는, 어쨌거나 ‘좋’이었다. ‘좋’까지는 확실하게 썼다. 히읗의 받침을 예쁘게 말아 올린 다음, ‘아’를 쓰려던 바로 그때였다.
“이 노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랐다. 분필이 뚝 부러졌다. 뒤를 홱 돌아보았다. 저만치서 누군가가 팔을 휘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학교 안에 사람이 있었다니… 선생님인가? 아닌데? 가만있자, 저분은 바로…? 그랬다. 그는 바로 학교 안팎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소사 아저씨였다.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할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무조건 도망이다.
달음박질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담벼락을 슬쩍 훑어보았다. [사 학년 육반 김희정은 임진우를 좋.] 딱 세 글자, ‘아한다’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좋’에서 그만 끝났다. 아쉬웠지만 일단은 도망쳐야 한다.
정신없이 내달렸다. 신발을 벗을 겨를도 없었다. 운동화를 신은 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쿵쾅쿵쾅 소리가 났다. 교실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내 자리에 앉을 생각은 미처 못하고 교실 벽 아래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켰다. 숨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문이 열리면서 소사 아저씨가 내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두근두근 훅훅훅. 한참을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교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겨우 숨이 제자리로 돌아올 즈음에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를 했다. 명수도 왔고, 희정이도, 현수도 나란히 교실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담벼락에 미처 쓰지 못한 글이 또 생각났다. 마저 쓰고 올까? 아냐,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어쨌거나 희정이 너는 오늘부터, 흐흐흐. 더 이상의 확실한 직격탄은 없을 것이란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금방 지나고 선생님도 출근했다. 너무 겁을 집어먹었던 탓일까?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수업 시작까지는 아직 십 분이나 남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뒷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그런데 아니, 저게 누군가? 화장실 앞을 지나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학생은 아니었다. 선생님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사 아저씨였다. 잔뜩 골이 난 표정의 아저씨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재빨리 교실로 들어왔다. 얼른 명수를 찾았다.
“명수야, 명수야!”
무슨 일인가 싶어 명수가 고개를 돌렸다.
“명수야, 옷 좀 바꿔 입자. 빨리!”
“머땜에 그라노?”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게. 퍼뜩!”
빼앗다시피 명수의 점퍼를 벗겨 내 팔부터 끼웠다. 나보다 체구가 작은 탓에 명수의 옷은 내 몸에 꽉 끼었다. 반면 명수는 헐렁한 거적을 걸친 차림이 되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아이들이 나와 명수를 번갈아 보았다. 얼른 내 자리로 달려와 고개부터 푹 숙이고 납작 엎드렸다. 옆자리의 묘숙이가 물었다.
“임진우, 니 와 그라노?”
“아, 박묘숙. 선생님이 물어보시믄, 내 아프다캐라, 알겠제?”
“……”
운명의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다가온다. 나는 눈만 살짝 내놓은 채 동태를 살폈다. 교재를 챙겨 든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섰을 즈음, 교실문이 드르륵 열렸다. 아뿔싸, 교실로 들어선 것은 역시나 소사 아저씨였다.
“소사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선생님이 먼저 인사를 했다. 머리를 긁적이던 소사 아저씨가 곧 말을 이었다.
“다른 게 아니고 김선생님예. 이 반에 김희정이라카는 학생하고, 임진우라는 학생 있습니꺼?”
대답 대신 선생님은 우리를 한 번 쓰윽 둘러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등에서 진땀이 흘렀다. 소사 아저씨가 팔에 찬 토시를 추스르며 다시금 말했다.
“오늘 아침에 어떤 학생 하나가 창고 담벼락에다 낙서를 하고 있데예. 그걸 제가 발견했는데 그놈이 다람쥐처럼 순식간에 도망을 가버렸어예. 학생이 담벼락에 낙서를 하믄 안되지예. 그래서 제가 지금 그놈을 찾고 있거든예. 그 녀석이 담벼락에 뭐라고 썼냐 하면…”
아저씨가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옮겨 적은 것 같았다.
“에 또, 사 학년 육반, 김희정은 임진우를 좋. 딱 ‘좋’까지 쓰고는 달아났단 말입니다. 혹시나 그래서…”
그 대목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순간, 선생님의 눈빛이 달라졌다. 분명 그때 내 낯빛도 달라졌을 것이다. 큰일 났다. 이런 장면을 예상했던 것은 절대 아닌데, 완전범죄를 꿈꾸며 그 결과를 즐길 생각만 했는데, 이거, 진짜로 큰일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