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며 희정이가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사 아저씨는 금방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입니더, 여학생은 아이라예.”
다음은 당연히 내 차례였다.
낙서의 범인이 나라는 것을 아저씨는 어떻게 알았을까? 아냐, 어쩌면 평소에 원한 관계나 다툼이 있었던 녀석들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진범을 잡기 위해 목격자 증언을 들으러 온 것일 지도 몰라. 누가 이런 낙서를 했는지 혹시 짚이는 데가 있니?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 절대로 긴장하지 말자.
“임진우?”
“……”
하지만 마음은 굳건한데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저 혼자 덜덜덜 떨었다. 덜컥 겁이 났다. 곧 닥쳐올지도 모를 비난과 꾸지람이 무서웠다.
몸을 추욱 늘어뜨리고 책상에 찰싹 달라붙었다. 끄응 신음소리까지 냈다.
“선생님예, 임진우, 아프다카는데예.”
정말 고마운 묘숙이. 묘숙아, 나중에 고무줄 끊을 일 있어도 한 번은 면제해 주마.
좀 전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니, 선생님은 아마도 그 대목에서 눈치를 챈 모양이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대로 이마를 맡겼다가 혹시나 멀쩡하다는 감정鑑定이라도 받게 되면, 그때는 진짜로 더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차라리 그냥 지금 일어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손을 들고 엉덩이를 뺐다. 선생님이 걸음을 멈추었다. 몸에 맞지 않는 명수의 작은 점퍼가 자꾸만 어깨를 조여왔다. 고개는 푹 숙인 채였다.
“네… 선생님…”
선생님은 소사 아저씨에게 용의자의 얼굴을 확인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아저씨가 한참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비슷하긴 한데… 하지만 저 옷은 아닌데…?”
역시 내 전략이 맞았다. 범인은 퍼런 옷차림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회색 골덴 점퍼를 입고 있는 것이다. 의심의 눈길은 여전했지만 범인 체포에 실패한 아저씨는 결국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래, 조금만 버티자.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순조롭게 넘어갈 것이다. 그때였다.
“선생님예, 진우 있잖아예, 명수랑 옷 바꿔 입었는데예.”
빌어먹을. 대관이 녀석이었다. 평생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던 대관이 녀석이 결정적 순간에 또 한 번 파투를 내고 만 것이다. 포청천 김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명수! 강명수, 일어나 봐.”
“예, 선생님.”
코를 훌쩍이며 명수가 의자를 밀었다. 끼이이익 소리가 났다. 헐렁한 점퍼가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아저씨가 크게 외쳤다.
“아아, 김 선생님, 맞습니더. 저 잠바 맞아예.”
눈앞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나를 돌아보는 희정이의 눈빛이 느껴졌다. 한심스럽다는 표정의 현수 얼굴도 얼핏 스쳤다. 이럴 때는 기절이란 걸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대로 쓰러지기엔 내 볼을 틀어쥐고 있는 선생님의 손이 너무도, 너무도 억셌다.
우선은 소사 아저씨를 따라가 담벼락의 낙서부터 지워야 했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벌 청소까지 해야 했다.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명수 역시 공범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김 선생님은 우리에게 별다른 꾸지람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털레털레 교문을 나서는데 명수가 물었다.
“진우야, 근데 니는 희정이를 왜 그렇게 좋아하노?”
대답하지 않았다. 임마, 니가 사랑을 알아? 놀이터 입구에서 현광이가 축구공을 들고 서 있었지만 본체만체 집을 향해 걸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희정이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편지를 써볼까?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직접 말을 할까? 어느 것 하나 내키지 않았다. 누나가 보는 책 어디에도 그런 것에 대한 도움말은 없었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릴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답을 찾았다. 저녁 내내 고민한 결과였다. 내 사랑을 희정이에게 전달해줄 도우미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김 선생님이었다.
서둘러 일기장을 꺼냈다. 선생님은 일기 검사를 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마지막 장에다 ‘참 잘했어요’, ‘더 열심히 하자’라는 말을 적어 주시니까, 이번에도 내 고민을 읽으면 분명히 도움을 주실 거야. 피실 피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혹시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자한자 정성을 다해 일기를 써내려갔다.
월요일 아침, 들뜬 마음으로 일기장을 제출했다. 과연 선생님이 어떤 답을 주실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다시 받아 든 일기장에는 ‘참 잘했어요’ 도장만 달랑 찍혀있을 뿐, 어떠한 말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뒷장까지 넘겨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선생님은 나를 미워하시는구나. 이게 다 담벼락 낙서 때문이고 대관이 녀석 때문이다. 희정이와 현수는 내 속도 모른 채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벌 청소가 끝나는 날이었다.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선생님이 들어왔다. 청소 검사를 하려는 것이다. 교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진우만 남고 다른 학생들은 가도 좋다.”
반 친구들이 빠져나간 교실에 선생님을 마주하고 섰다. 선생님이 의자를 밀어주며 가까이 앉으라고 했다.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전과자는 이래서 늘 괴롭다. 엉덩이를 의자 끝에 겨우 걸쳤다.
“진우야.”
“예, 선생님.”
“넌 희정이가 왜 좋아?”
슈우우웅! 직격탄이 날아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 공격이었다.
“그, 그건…:
우물쭈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다시 한번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냈다. 돌아보았다. 거기에 희정이가 서 있었다.
아, 선생님. 이렇게 확실한 답을 주시다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희정이가 다가왔다. 발소리보다 내 심장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쿠궁쿠궁쿠궁.
“오, 희정이 왔구나. 정확하게 시간을 맞췄네?”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본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희정아, 너는 진우가 널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니?”
“네, 선생님. 알고 있어요.”
뭐라고? 알고 있다고? 그럼 그렇지. 나의 절절한 구애求愛를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눈을 속일 필요가 있으니까 일부러 더 냉랭하게 굴었던 거지. 현수랑 친한 척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인 거지. 과연 희정이도 천잰데? 나는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선생님.”
“응, 희정아.”
선생님도 나도 희정이를 쳐다보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우리 사랑, 반 아이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이런 말? 허허허, 당연하지. 비밀로 해야지. 사랑은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에요. 러브 이즈…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런데요 선생님, 전 임진우가 싫어요.”
뭐어? 이 가시나가 지금 뭐라카노? 내가 싫다고? 선생님도 역시나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아니 왜? 진우는 공부도 잘하고, 재미도 있고, 친구도 많잖아. 현수처럼 말이야.”
선생님, 거기서 갑자기 현수가 왜 나옵니까? 일단 희정이 말부터 들어봅시다.
“임진우가 싫은 이유는요…”
꿀꺽. 침을 삼켰다. 싫다고 하는 마당에 ‘이유’ 따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혹시나 주어질지도 모를 반박과 변론의 기회마저 놓쳐선 안될 것 같았다.
“임진우는요… 팔꿈치가 까매요.”
사람의 인생을 영화로 찍는다면 실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도 분명 편집 담당자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을 촬영하던 전지전능하신 감독님은 그날 편집 기사와 아마도 이런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루돌프 기사, 이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니 편집해서 들어냅시다.”
“그게 좋겠네요, 클로드 감독님.”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팔, 꿈, 치, 가, 까, 매, 요. 그 대사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분명히 교문을 달려 나가는 내 뒷모습이었다. 폭탄 발언의 메아리 효과는 다음 씬까지 이어졌다. 연결된 배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억울함보다 서러움이 더 컸다. 가방부터 저만치 내팽개쳤다. 부엌으로 얼른 들어가 엄마가 하던 방식대로 연탄불 위에 양철 세숫대야를 올린 다음 물을 가득 채웠다. 비누와 때수건을 가지고 왔다.
윗옷을 벗었다. 앙상한 몸에 걸쳐진 러닝 셔츠가 펄럭하고 바람을 일으켰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허리를 숙였다.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대야 속에 담갔다. 적당히 데워진 물이 금방 온기溫氣를 전했다. 팔을 다시 꺼냈다.
‘어디가, 어디가 까맣단 말이고? 내 팔꿈치, 도대체 어디가 까맣단 말이고'
팔꿈치 언저리를 대충 비누로 씻은 다음, 때수건에 손을 집어넣고는 팔꿈치에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팔, 꿈, 치, 가, 까, 매, 요.
자꾸만 입술이 실룩거렸다. 안된다, 절대로 울면 안 된다. 눈물이 나오려고 할수록 손에 힘을 주었다. 눈물과 힘이 서로 힘겨루기를 했다. 어디가, 어디가 까맣다고? 그래서, 팔꿈치가 까맣다는 이유로 내가 싫다고? 눈물이 이길 것 같았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눈물이 이기면 안 되는데. 그때 부엌문이 활짝 열렸다.
누나가 서 있었다. 힘이 그만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터져버렸다.
“진우야, 니 거기서 뭐하노?”
“엉엉, 누나야, 엉엉. 희정이, 그 가시나가… 엉엉.”
약이 닿은 팔꿈치가 쓰라렸다.
“그래서 혼자 때를 밀고 있었다는 거가? 이렇게 피가 날 때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누나가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이구, 우리 진우를 울게 만든 그 아이가 대체 누고?”
간사한 입은 일편단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또다시 희정이 예찬이 시작되었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삼 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고, 집은 어디에 있고, 현수, 아 참, 현수는 아니고…
그날 누나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고작 열한 살이었던 내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있었다. 모든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는 확실한 이유는, 이야기를 듣다가 누나 품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희정이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다만 변함없이 희정이를 좋아했고, 변함없이 현수를 미워했으며, 어떻게 하면 둘 사이를 떨어뜨릴까 매일매일 신통방통한 작전을 짜곤 했다. 물론 매번 실행하지 못하거나 실패로 돌아간 것이 대부분이었다.
12월 즈음엔가 또다시 짝을 바꾸면서 드디어 희정이와 앉을 기회가 생기긴 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무릎에 힘을 잔뜩 주고 키를 한껏 크게 만든 다음, 변함없이 묘숙이와 짝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이천일 년 가을, 옛 동창 찾기가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홍대 앞 어느 주점에 명수와 현광이, 현수가 먼저 와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내 뒤를 이어 묘숙이, 그리고 희정이가 차례로 들어왔다. 희정이를 보는 순간,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희정이와 짝이 될 마지막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묘숙이를 짝으로 선택했던 그날의 내 판단이 정말로 현명했다는 것을 말이다. 긴 팔 외투를 입었지만 나도 모르게 팔꿈치를 손으로 가렸던 것 또한 현명하기 그지없는, 본능적 방어였다고 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