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어느 화창한 날의 아우슈비츠

[퐁당퐁당 여행기 3. 폴란드 크라쿠프]

230529 폴란드 크라쿠프 (& 오시비엥침)



가는 방법

 예약해 둔 입장시간이 아침 9시 반이었기 때문에,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아우슈비츠를 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가 크라쿠프에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길래 부리나케 일어난 것이었다. 가는 방법이 인터넷에 잘 안 나와있어서 일단 무작정 버스터미널 간 다음에 표를 샀는데, 무조건 현금만 받아서 ATM에서 소액환전했다. 표값은 왕복 40 즈워티(한화 약 12,000원)였다.
버스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조그만 봉고차를 타고 07:25에 오시비엥침으로 출발했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려서 한 시간 40분여 만에 도착했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내린 곳이 아우슈비츠 박물관까지 거리가 조금 있어서, 여유롭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도 9시 반에 거의 딱 맞춰서 도착했다.




제1수용소,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로 들어가는 길
희생자들의 신발
희생자들의 가방 및 소지품

 아우슈비츠는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비르케나우) 둘로 나뉘어있다. 먼저 나는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를 방문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아서 놀랐다.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가 이렇게 규모가 작다고?"

사실 우리가 아는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는 바로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였다. 전쟁이 막바지로 흘러갈 무렵 유대인들을 대거 수용하고 살해하기 위해서 나치는 확장된 수용소를 메인 수용소 근처에 마련하였고, 그것이 바로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였던 것이다. 특히 1944년에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고 나서 헝가리계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수송하여 이들을 대량학살하였다. 물론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는 분명하게 구획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나치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의 대명사'로 널리 쓰인다.  


수용소에는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 소수민족, 소수종교까지 공통적으로 독일 나치의 이른바 '게르만 신화'에 부합되지 않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 정치범들과 소련군 포로들도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90%에 해당하는 다수의 수감자들이 유대인들이었고, 또 그중에서도 헝가리계 유대인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1940년에 지어진 제1수용소는 원래 폴란드인들, 그러니깐 폴란드 정치범들과 폴란드 유대인들을 주로 수용한 노동캠프였다고 한다. 그러나 41년에 히틀러의 지시로 살상을 시작하였고, 42년부터 본격적으로 살상이 이루어지면서 죽음의 캠프로 그 성격을 완전히 뒤바꾸게 된다.


죽음의 벽. 이곳에서 희생자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이름의 책'.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이 거대한 책 안에 적혀져있다.

Study Tour

이 날 나는 미리 예약해 둔 6시간짜리 English 스터디투어로 아우슈비츠를 둘러보았고, 같이 다닌 인원은 한 15명 정도였다. (3시간짜리 일반투어도 있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은 조금 더 많아 보였다.) 투어는 2부로 구성되었는데, 오전에는 먼저 제1수용소를 구경했고 30분가량의 짧은 휴식 시간 뒤에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제2수용소를 둘러보았다.


제1수용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바로 '죽음의 벽'이었다. 저 회색 벽 앞에 세워놓고 수감자들을 총살시켰다고 한다. 공포스럽고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이름의 책'(The Book of Names)이었다. 영원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살해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책에 아로새겼다는데, 말도 안 되게 두꺼운 책이 수 십 권 이어져있어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 제 1수용소의 모습

수감자들의 개인정보(언제 수감하여 언제 사망하였는지)가 기입된 얼굴사진 수십 장이 걸려있는 벽도 지나갔는데, 그 표정 하나하나를 보면서 '익명'으로 다가왔던 무수히 많은 희생자들이 그제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많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방식으로 희생당했기 때문에, 생각하면 할수록 여기서 일어났던 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오히려 무감각해지기도 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여성 피해자들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카펫. 들어보기는 했는데 실제로 보니깐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그 카펫을 보면서 같이 있던 관광객 분도 표정이 무척 어두워지셨다. 희생자들의 안경, 신발, 소지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이 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존했나 싶었다. 보면서 마음이 참 묘했다.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가스실 가는 길.     이 끔찍한 길이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현실적이고 잔혹하게 느껴졌다.


제2수용소는 정말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아있는 것이 많이 없었다. 나치 독일이 퇴각하면서 주요 시설들을 대부분 철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기차가 내리는 곳에 스탠드도 없었고, 건물들도 대부분 잔해만 남아있었으며, 전쟁범죄의 가장 큰 증거가 되는 가스실 또한 철거되고 없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나치들이 철수하기 전에 존더코만도를 시켜서 3달에 걸쳐 이 시설들을 해체시켰다고 한다. 그 뒤에 대부분의 존더코만도들은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에게 독이 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란의 와중에서 일반 수용자들의 대열에 껴서 존더코만도가 아닌냥 숨어있거나, 아님 아예 수용소를 탈출해 버린 운이 좋은 존더코만도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 중요한 증언들을 하게 된다.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 사람들이 이 숲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사람들이 선별작업을 당해야 했던 곳을 지나, 가스실 쪽으로 걸어갔다. 날씨는 유난히 화창하고, 경쾌한 새소리가 들려오고, 풀내음을 싣고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싱그러운 초록빛과 군데군데 피어난 꽃들이 시각적으로 편한 마음을 들게 해 주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이 가스실로 향하는 길이라니, 그 부조화가 비극성을 더 극적으로 부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선별작업을 당해서 가스실로 당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혼란스럽고 두렵기도 하고 지쳐있었을 테지만,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평화롭고 평범한 풍경을 지나 나무 밑에 앉아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들은 곧 가스실로 들어가, 바로 그 앞의 공터에서 화장되어 하늘로 희뿌옇게 올라갔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을까.

바로 이 공터다.


선별작업으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강제노역에 투입되었다. 이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적적으로 아우슈비츠 안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곧 '죽음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이 진군해 옴에 따라 나치는 수용소 건물을 무너뜨리고 대부분의 수감자들을 본토 쪽 수용소로 행군시켰다. 이 과정에서 또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가이드님의 가족 중 한 분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바로 이 '죽음의 행군'에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이곳에서 삶과 죽음은 우연과 확률의 문제였다. 물론 삶에 대한 의지를 끝까지 가지고 있었던 건강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기는 했겠지만, 그 확률은 사실 그렇게 의미가 없었다. 그 누구라도 이 지옥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빅터프랭클은 확률적인 삶과 죽음에 연연하기보다는, 내 앞에 주어진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태도'를 지닐지, 즉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는 편이 결과적으로 삶으로 나아갈 확률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 한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라는 점을 그는 주목한다. 그 '자유' 말미암아 그는 '살아도 죽어있는' 수용자들과는 달리, 인간다운 인간으로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 있었다.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모습
제3가스실 잔해

빅터프랭클의 책을 읽고, 또 아우슈비츠에 직접 다녀오면서  각을 메모로 남겨두었다. 물론 그 끔찍한 경험과는 애초에 비교할 수 없지만.


불확실하고 불안정적인 삶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만 하루하루와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마주하는 내 태도를 잘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불확실함 앞에서도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아름다운 순간들로 채워가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슬로패스로 박물관 뽕 뽑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