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스웨덴으로 간다고 했을 때 어른들은 걱정부터 하셨다. 자식이 지구 반대편 먼 나라로 떠나 오랫동안 지낸다는데 걱정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은, 막연한 걱정은 분명 아니었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영화를 예전에 봤다면서, 한국계 입양인들이 스웨덴에서 온갖 차별을 겪어야 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 아직 스웨덴에는 한국이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만만하게'보이면 안된다면서 괜히 비싸 보이는(실제로도 꽤 비싼) 지갑을 들려 보냈다.
바로 이 영화다.
막상 스웨덴에 와서 지금까지 나는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분명 나와 같이 스웨덴에서 공부하고 있는 다른 한국인 학생들에게 물어보았을 때도 그들은 전혀 인종차별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개방화가 덜 된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동양인'을 신기하게 쳐다본다거나 슬쩍 다가와서 비웃고 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스웨덴은 아니었다.
나는 스웨덴이 인종차별 없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닐까, 그래서 어떤 면에서 참 이상적인 사회가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스웨덴은 낙원이 아니었다.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변화하는 사회라고까지는 말 할 수 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적인 사회는 결코 아니었다. 차별도 있었고, 사회에 제대로 소속되지 못한 채로 겉돌 수밖에 없었던 이민자들, 입양아들도 있었다.
영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시피,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인들은 '피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어야 했고, 직접적인 차별을 당하지는 않더라도 완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속하지 못한다는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예전에는 지금만큼 동양인들이 아직 유럽에 많지도 않았고, 스톡홀름이나 예테보리 같은 큰 도시에서는 조금 덜 했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그들과 다른 외모를 가진 동양인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사람들이 봤다고 한다.)
이러한 차별과 소외감을 마주해야 했던 이들은 각자 시기는 다르지만, 대부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한국이라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거나, 한국어를 배우거나, 직접 한국에 가보거나, 아니면 자신을 낳은 부모님을 직접 찾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스웨덴에서 한국계 입양인들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은 스웨덴에 와서 세 달쯤 되었을 때였다. 사실 스웨덴에 입양온 한국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적은 없으니 그게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는데, 그들과 직접적으로 마주하면서 그들의 존재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스웨덴 친구를 만났을 때였다. 그에게 '왜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지' 물어봤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에서 입양된 친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도 한국말은 아직 할 줄 몰라. 그 친구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해서 나도 같이 배우고 싶어"
한 번은 웁살라에 있는 언어교환카페를 갔다가 묘하고 이국적이면서 동시에 친숙한 인상의 친구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입양된 분이었다. 이 친구도, 그리고 이 친구의 어머님도 한국말을 아직 잘할 줄 모른다고 했지만 언젠가 꼭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며 내게 연락한 스웨덴친구도 있었다. 알고보니 그 친구 역시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입양된 친구였다.
스톡홀롬 국립현대미술관에는 현재 한국계 해외 입양아를 다루는 전시가 작게 진행 중이다. 사라 세진 장 작가의 작품.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입양된 사람의 숫자는 1만여 명이니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잔 브링크'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양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학대를 당했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이런 대사도 나온다. "네 눈이 찢어져서 사람들이 네가 쳐다보면 기분이 나쁘대." "너는 왜 눈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뜨니?"
괴로운 청소년기를 보내고 힘들게 독립한 그녀였지만 미혼모가 되어 자살시도를 할 정도로 그녀는 힘든 시기를 또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종교의 힘으로 가까스로 시련을 극복한 그녀는 웁살라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수잔 브링크가 공부한 대학이 현재 내가 공부하고 있는 웁살라대학교라고 해서 기분이 묘했다. 그녀가 나와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수십 년 전에 그녀도 이 캠퍼스를 거닐었겠지. 이곳에서 공부하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씩 새 살이 돋아나고 상처가 아물어갔겠지.
웁살라대학교 인문대학(English Park)의 모습. 사진에 잘 담기지 않았지만, 참 아름다운 곳이다.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인들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방황하는 수많은 수잔 브링크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냥, 한국말로 반갑게 '안녕'하고 인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