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스웨덴에 와서 시간표를 봤을 때, 나는 이곳저곳 놀러 다닐 생각에 기분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내 시간표!
특히 한국대학 시간표랑 비교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여유로운 시간표였다. 한 7학점 정도 신청하면 이런 시간표가 나올려나? 보통 한국대학에서는 16~20학점 정도 수업을 듣는데 그거랑 비교했을 때 1/2에서 1/3 정도 되는, '공강'으로 가득한 행복한 시간표였다. '아.. 이런 게 바로 스웨덴식 여백의 미인가?' '역시 동양인들은 너무 아득바득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이렇게 여유롭게 공부도 하고 놀 것도 놀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사는 삶이 바로 북유럽 라이프구나~' 하고 내 멋대로 빠른 이해를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표에 완전히 속아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웁살라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인 Carolina Library.
스웨덴 학교에서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수업은 세미나 수업이었다.
그리고 시간표에 비어있는 부분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도 되는 '공강'이 아니라, 그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다른 학과나 아니면 스웨덴 內 다른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어봤을 때도 다들 공통적으로 답했다. 한국대학에 비해 세미나식 수업의 비중이 컸고, 시간표가 여유로운 대신에 다음 수업을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다.
(물론 모든 걸 일반화시키기는 어렵다! 스웨덴대학도 한국대학도 학교마다 학과마다 교수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을 수 있다. )
예컨대 학생들은 다음 세미나까지 100페이지에서 300페이지(수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들었던 수업은 대체로 그랬다.) 분량의 아티클을 읽고, 세미나 질문을 준비해 가야 했다. 하루에 적게는 30페이지에서 많게는 100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읽고 이해해야 다음 수업을 갈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수업은 강의를 녹화영상으로 온라인에 올려두었고, 퀴즈도 풀어야 했다.
굳이 오프라인에 만나서 일방식 강의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는 모양인지, 강의는 온라인으로 돌려놓고 오프라인에서는 세미나나 활동 위주의 열린 형태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수업에서는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했고, 그룹활동을 참 많이 시켰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이 모든 세미나 수업이 영어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친구들도 물론 많았지만, 다른 EU국가에서 온 친구들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님에도 모국어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했다. 영어와 다른 유럽언어 간의 언어적인 유사성이 가깝고,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노출된 환경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을 감안해도, 너무 잘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국에서만 자라온 나는 그들과는 달랐다. 영어로 말을 하는 것이 너무 부담이었다. 한국말로 했어도 쉽지 않은 세미나였겠지만, 영어라서 더욱 고역이었던 세미나였다.
물론 수업이 나를 많이 힘들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대학에서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수업과는 다른 형태의 수업을 경험하면서 참 흥미로웠다. 물론 한국에서도 세미나만 주구장창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또 조별과제랑 발표 많이 시키고 여러 개의 레포트까지 요구하는 수업도 많다. 대학생들이 학기 중에 죽어가는 이유는 보통 강의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조별과제나 발표와 같은 '활동'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다만 한국대학에서는 대체로 이런 '활동'들이 일방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를 보완하는 느낌이 강했다. 다시 말해 '강의'가 주였고, '활동'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부차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활동'이 주이고, '강의'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부차적인 요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강의식 수업의 경직됨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 배경지식으로서 '강의'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어떤 형태의 수업'과 잘 맞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레포트와 발표와 같이 내가 직접 찾아보고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직접 찾아보고 정리한 것들이 기억에 오래 남고 자기 것으로 잘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강의식 수업도 참 좋아한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지식을 강의자로부터 전해 듣는 일은 그것 자체로 참 재미있고 좋기 때문이다. (강의자가 정말 지루하게 말을 하는 사람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스웨덴에서 수업을 들으며 한국대학에서 들었던 그런 15강짜리 '강의'가 참 그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미나는 늘 힘들었다.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에너지소모가 가장 많은 형태의 수업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내성적인 성격인 탓도 있겠지만, 원래도 배움에 있어서 '말하기'가 제일 어렵다. 듣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아주 어렵지 않다. 듣는다는 것은 다소 수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하기는 다르다.
자기가 공부하고 이해한 내용을 남들 앞에서 말하려면, 단순히 듣고 이해했을 때보다 더 깊고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는 보다 능동적인 행위이고,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상적으로는 세미나수업을 통해서 가장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수업이야말로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많이 배워갈 수 있게끔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