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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Mar 28. 2022

아버지와 마지막 한 달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유대감이 강했다.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고 좋은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다. 사춘기에 아버지와 다소 거리감이 생긴 뒤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와 점점 멀어졌던 것 같다. 

나도 장남 노릇을 잘하지 못했지만, 노인이 된 아버지는 내게 일종의 업(業)이었고 어깨에 짊어진 짐이었다. 더럽고 냄새나고, 겉으로는 아들을 엄청 위하는 척하시면서 아들 말은 전혀 듣지 않는 고집불통에 엉뚱하시고 친절한 듯하면서도 불편한 면이 있었다. 


아버지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사람 좋아하고 농담 좋아하시고 긍정적이셨다. 젊은 시절부터 사람 많은 델 좋아하셔서 결혼식, 장례식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다. 나이 드신 뒤 최고의 취미이자 즐거움은 만나는 사람마다 사탕을 손에 쥐어주시는 일이었다. 오래전에 인기 있었던 밀크 캐러멜이 집에 항상 쌓여 있었고, 주머니와 가방에 항상 캐러멜과 사탕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나는 늘 못마땅하고 창피했다.      


아버지는 20여년 누워계셨던 할머니를 돌봐드리고 지내셨는데, 몇 년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치매가 조금씩 진행되어 왔다.    


외로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고, 늘 농담과 웃음으로 포장하고 계셨지만, 사람 좋아하시는 아버지께 독거노인의 생활은 큰 고통이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통은 내 어깨의 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고통은 아버지와 내가 함께 감당해 내야만 하는 공동의 업(業)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치매 증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힘들게 했다. 아버지는 순간순간의 감정에만 집중하시고,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정보를 설명해 드리기가 너무 어렵다. 그리고 불편한 이야기가 이어질 때는 언제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고 하신다.   

     

5~6년 전 쯤 치아가 심각한 상태가 되어 틀니를 해 드렸는데, 치과 다니는 동안 “의사가 설명도 잘 안 해주고 자기 멋대로 한다”며 아프다고 의사 욕을 엄청 하시면서 안 가시려고 해서 고생고생하며 틀니를 만들어 드렸다. 틀니가 완성되어도 한 번에 잘 안 맞으니까 병원에서는 불편하면 와서 수정하라고 했는데도, 의사가 잘못했다며 소용없다고 안 가시려는 걸 억지로 모시고 가서 딱 맞춰드렸더니 아무 말 안 하시고 잘 쓰셨다. 그러다 작년에 아래 틀니를 잃어버리셔서 다시 틀니를 하게 되었는데, 치아 상태는 더 악화되어 있었고, 5년 전보다 엄살이 훨씬 심해지셔서 한 달 동안 치과 모시고 가는 일이 너무 고생스러웠다. 약속을 잡아도 안 오실 것 같아 며칠 전부터 전전긍긍하며 전화로 계속 약속 확인하고 안 오시겠다면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사정해 보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틀니를 했다. 틀니 하는 동안 아버지랑 너무 많이 싸워서 아내는 걱정, 아이들은 나에게 거리감을 갖기도 할 정도였다. 

이 당시에도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틀니는 한 번에 맞지 않았고, 수정하러 가야 하는데 소용없다고 안 가려고 하시는 걸 가까스로 모시고 갔는데, 아프다고 엄살 부리시다가 어느 순간 틀니가 딱 맞으니까 입을 꼭 다무시고 전혀 다른 표정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변해서, 간호사가 다시 입을 벌리라고 해도 안 벌리고 버티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고통받으며 가까스로 틀니를 해 드렸는데 한 달도 못 돼서 아래 틀니를 또 잃어버리셨다. 화가 나서 나에게 사과하라고 했는데 끝까지 사과를 안 하셨다.       


아버지는 나와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내가 아버지 댁을 방문하는 건 무조건 밥 같이 먹으러 오는 줄로 아신다. 그리고 식당에 가면 주문하고 늘 현금으로 밥값을 먼저 내신다. 한동안은 “어차피 제가 드리는 돈인데 너무 체면 차리려고 하지 마시라”고 타박을 드리다가, 나중에는 같이 식사할 때 어른으로서 계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신다고 생각되어 그냥 계산하시게 했다. 그것도 아버지의 ‘취미생활’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내가 어느 날이고 집에 가겠다고 전화드리면 항상 “바쁜데 오지 마”라고 하시는데, 우리 집에는 전화도 안 하시고 마음 내킬 때 과자 사들고 오신다. “바쁜데 오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는 “포 미 이즈 포유”(for me is for you)라거나 “역지사지”라고 설명하시곤 했는데, 당신은 우리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오시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전화하고 오시라고 늘 주의를 드렸다. 그러면 우리 집 가까이 와서 전화하시거나, 댁에서 출발할 때 전화하시는 경우라도 이미 오실 것을 마음먹고 전화하시기 때문에 어차피 말릴 수가 없다. 잔소리를 하면 집에 도착하기 전에 전화를 하시다가 얼마간 시일이 지나면 또 그냥 오신다. 먹을 거 가져오시는 건 감사한데, 너무 막무가내여서 식구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 했다.    

  

항상 더럽고 해진 옷을 입고 다니셔서 옷을 사드리려고 해도 절대 안 받아들이시고, 당신이 해진 옷 입고 다니는 걸 언제나 “프라그마티즘”(pragmatism)이라고 설명하셨다. 미국 이민 시절에 배운 말씀이라고 계속 쓰셨던 것 같다. “더러운 옷 입는 게 프라그마티즘은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늘 같은 대화는 반복된다.      

그래도 항상 밝은 얼굴로 건강하게 생활하신 것은 다행이었다. 집에 있는 건 답답해 하셔서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하시고 나면, 밖으로 나가 하루 종일 돌아다니신다. “워킹 포 헬스”(walking for health)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셨다. 어디 다녀오셨냐고 물으면 가장 많이 하시는 대답이, 전철 타고 북으로는 소요산, 남으로는 고양시의 대화역, 동으로 춘천, 서쪽으로 인천까지 다녀오신다는 것이었다. 특히 서울 시내 밖으로 나가 전차가 지상으로 달리면 바깥 경치 구경할 수 있는 “관광열차”라며 좋아하셨다. 소요산 가시면 늘 호떡을 사드신다고 하고, 대화역은 예전에 일산 살던 적이 있어서 추억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춘천은 군 복무를 춘천에 있는 군 방송국에서 하셨다고 군 복무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활동적이신 게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 때도 있다. 주무시다가 소변 때문에 자주 깬다고 하신 적이 있어서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드렸더니 좋아지셨다. 몇 달 동안 약을 잘 드시고 나서 같은 약을 다시 지었는데, 이번에는 또 효과가 없다고 하신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아 전립선 검사를 하고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은 문제가 없었고, 하룻밤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하룻밤을 조용히 누워 있어야 하는 게 문제였다. 밤새도록 “집에 가야한다”, “나가는 게 좋겠다”, “왜 마음대로 못하게 하냐”시며 일어나시려고 해서 그걸 말리며 밤을 새웠던 일이 있다. 오죽하면 간호사가 “효자”라고 칭찬을 다 했을지, 아이고...     

       

문제의 시작은 지난 설날 즈음부터였다. 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좀 심해지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TV 보면서 뇌에 좀 부담이 있는 것 같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당신도 스스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으신 것 같았다. 검색을 해보다가 “치매안심센터”라는 기관을 발견했다. 예약을 하고 약속한 날 아버지 댁으로 갔다. 준비물을 찾는데, 아버지의 주민등록증이 안 보인다. 여쭤보니 잘 모르시겠다고 한다. 센터에 문의해 보니 주민등록등본이라도 가져오라고 해서, 주민센터를 들러 등본을 발급받고 치매안심센터로 갔다. 첫날은 상담 위주로 검사가 진행되었고, 의사 면담을 위한 두 번째 방문 예약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주민등록증 재발급을 위해 주민센터에 다시 들렀는데, 사진이 필요하단다. 사진관을 검색하고 돌아다녔으나 폐업 아니면 너무 고급 스튜디오였다. 포기하고 다른 날 다시 아버지와 지하철 무인 사진점에서 사진을 찍고 주민센터로 갔다.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해 창구로 가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버지가 '이거 필요하지 않냐'는 느낌으로 주민등록증을 내 앞에 던져 놓으셨다. ‘주민등록증’이 뭔지 모르시는 것이었다. 주민등록증을 뺏어서 내가 보관했다.      


설날 쯤부터 알게 된 또 한가지 문제는, 아버지의 오른쪽 종아리가 많이 부으신 것이었다. 항상 증상이 심각해져야 말씀을 하시고, 병원 가지고 하면 또 극구 안 가시겠다고 한다. 이번에도 아프다고 말은 꺼내셨는데, 병원은 안 가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거의 2주 만에 동네병원을 방문했다. 의사 말로는 “하지부종”이 심해서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자기 병원에서는 제대로 검사할 수도 없어서 진료의뢰서를 써 줄테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진료의뢰서를 받고, 대학병원에 예약을 했다.      


치매안심센터 2차 방문 전날 밤에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약속을 확인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전화할까 했는데 늦게 일어나서 전화 없이 시간 맞춰 나갔다. 아버지는 대개 일찍 아침 식사 후 외출을 하신다. 전날 밤에 약속 전화를 했으니 잊지는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 댁에 가보니 안 계셨다. 기다리다 시간이 다 되어 가서 할 수 없이 혼자 갔다. 2차 방문 예약할 때 아버지와 같이 와야 하냐고 물었더니 “같이 오면 좋다”는 정도로 대답을 받아서 혼자 가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걸어보라 하기도 하는 등 환자를 면밀히 관찰한 뒤에 판정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약속 잡을 때 정확한 정보를 못 들었다고 불평하다가 하는 수 없이 약 2주 반 뒤로 다시 예약을 잡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 전화 드렸더니 집에서 전화를 받으신다. 친구 전화가 와서 만나러 갔다고 하셨다. 내가 맡은 공연도 가까이 있었고, 작업할 것도 너무 많은 와중에 어렵게 약속을 잡았는데 허사가 되어서 화가 많이 났지만, 말 해 봐야 못 알아들으실 것 같아서 대충 전화를 끊었다.      


어느 날 경찰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께서 은행에서 현금인출기를 사용하다 비밀번호를 잊으신 모양인데, 은행 직원에게 해결해달라고 떼를 쓰며 행패를 부리신 모양이다. 은행 직원이 경찰을 불렀던 것이었다. 사실 예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일단은 집으로 돌려 보내드리기로 했고, 이튿날 아버지 댁으로 갔다. 조금 창피한 생각이 들어 다른 지점에 가서 비밀번호 변경을 하려고 했다. 뭘 하려는지 이해를 못하시는 아버지는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신다. 가까스로 준비물을 챙겨 나왔다. QR 스캔을 위해 휴대폰 챙기실 것을 몇 차례 확인드렸다. 두 블럭 정도 거리를 가까스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겨우 도착했다. 휴대폰 달라고 하니 모르겠다고 하신다. 안 가져왔냐고 물으니까 없다고 하신다. 난감했다. 다시 아버지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가다가 지하철 입구가 나오면 나에게 집에 가라고 하신다. 아니라고 집에 가자고 하면 안 가려고 버티신다. 그런 실랑이를 계속하면서 억지로 억지로 집에 다시 왔다. 집에 들어가 보니 휴대폰이 없다! 아버지 가방을 뒤져보니, 휴대폰을 갖고 나갔으면서 없다고 하셨던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은행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더욱 완강하게 안 가려고 하셨다. 아버지와 길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왜 그러냐고 묻는다. 아버지가 눈에 익은 동네 분들이었나 보다. 그중 한 사람은 노인복지센터 직원이라며 앞으로 나섰다. 사정 설명을 하고 사람들을 이해시킨 뒤 다시 은행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은행으로 갔다. 아버지는 나를 뿌리치고 현금인출기에 가셔서 카드를 넣고 인출을 시도하신다. 현금 인출이 안 되자, '봤냐?'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신다. 다시 아버지를 붙들고 억지로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데, 아버지는 계속 밖으로 나가려고 하신다. 내가 출구를 막고 서있으니 화장실 가시겠다고 사무실 쪽으로 가시려다 경비에게 제지당하신다. 아버지가 계속 소란을 피우시니 직원들이 순서를 당겨줬다. 창구에서 비밀번호 변경 절차를 밟는데 아버지는 계속 말을 안 들으신다. 통장이나 카드도 안 주시려고 하고 서명도 억지로 하고 새 비밀번호 누르라고 해도 안 하시려고 한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직급 높은 직원이 “아버지가 비밀번호 변경하시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이면 해드릴 수 없다”고 한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다른 지점에서 있던 일을 여기 와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원래 지점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은행을 나왔다. 기분이 참담했다. 아버지를 속여 돈 뺏으려는 나쁜 아들로 생각했을 것 같다. 길거리에서 아버지께 계속 설명을 해도 안 들으려고 하시고, 통사정을 하면 그러자고 했다가 이내 집에 가시겠단다. 아버지도 계속 내가 당신을 속이고 해를 끼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길에서 한동안 논쟁을 벌이다가, 화장실에 다녀오신 뒤 좀 부드러워지셨다. 

택시를 타고 원래 지점으로 가던 중 전화가 왔다. 주민센터 직원이다. 아까 길에서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던 것을 본 동네 주민이 주민센터에 신고를 했던 모양이다. 직원이 내 번호를 아니까 확인하러 전화를 한 것이다. 아버지가 나와 같이 있음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은행에 다시 도착해서 비밀번호를 바꿨다. 은행 직원은 내가 이바지 카드를 보관하고 그때그때 돈을 찾아드리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했는데, 그렇게 하기는 너무 어려워서 아버지께 카드를 드리고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다. 지난번에는, 그날따라 비밀번호를 착각해서 여러 차례 잘못된 번호를 누르셨는데, 비밀번호를 그날 사용했던 번호로 하기로 하고 변경을 했다가, 다음 날엔 다시 원래 쓰던 번호를 사용하니 또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아버지께 가서 원래 지점을 방문해 비밀번호를 바꾸고 카드를 내가 가져왔다.    

  

화가 나서 일주일 동안 아버지 댁에 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달이 바뀌었고, 불안한 마음에 아버지 댁으로 갔다. 아버지에게 열감이 있었다. 코로나 검사를 위해 보건소로 갔다. 늘 그렇듯, 보건소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가까스로 보건소에 도착하니 거의 마감할 찰나였다. 사정을 해서 겨우 검사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검사하는 동안 아프다고 난리를 치셔서 내가 아버지 머리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검사를 마쳤다.      

이튿날 아버지의 코로나 확진 통보를 받았다. ‘하지부종’ 때문에 대학병원 예약한 건 할 수 없이 일주일 뒤로 변경했다. 치매안심센터 예약일은 격리해제 직후여서 방문해도 문제는 안된다 했는데, 방문 전날 아버지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약을 넉넉하게 사서 집에 있는 투명한 통에 넣어드리고 하루 세 번씩 드시라고 당부했다. 이튿날도 와서 먹을 거 좀 챙기고 약 먹는 거 확인하고, 절대 외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버지를 방문하면 안된다는 의견들이 날아들었다. 특히 우리 집 식구들은 백신 접종을 안 해서 더욱 위험하기도 했다. 고민을 했으나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이 서운하고 뼈 아프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매일 전화를 드려 약 드시는지, 외출은 안 하고 계시는지 확인을 했다. 처음엔 좀 헛갈려 하시더니 나중에는 약도 드신다고 했고, 외출도 안 하겠다고 하셨다. 며칠 지나서는 음식이 모자랄 것 같아 먹을 걸 좀 사서 현관에 걸어드리고, 전화해서 설명하고 갖고 들어가시라고 했다.    

  

치매안심센터 예약일 전날이 되어 전화 드리니 목소리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약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약속 당일이었던 금요일에 치매안심센터 방문을 위해 아버지 댁으로 갔다. 기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았다. 택시 안에서 이상한 말씀을 자꾸 하신다. 어느 네거리에서는 “오른쪽으로 가면 사우나가 있다”며 계속 사우나 얘기를 하셨다. 나도 같이 정신이 없었는지, 택시에서 내렸는데, 목적지보다 한참 전에 내리고 말았다. 어쩌나 생각하다, 시간이 좀 여유가 있기에 두 블록 정도를 걸어갔다. 나중에 생각하니 다시 택시를 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가다가 아버지께서 아는 건물이 눈에 띄거나 식당이 나오면 들어가자고 하신다. 그리고 그날은 정말 마주치는 사람마다 캐러멜을 주려고 하셨다. 감사하다는 몸짓과 표정으로 받는 사람도 있지만, 깜짝 놀라 피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너무 오래 걸으셨다. 


치매안심센터에는 거의 약속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의사를 만나러 들어갔다. 의사는 많은 질문을 하지 않고도 바로 치매라는 것을 감지한 듯했다. 의사 앞에서도 사우나 얘기를 계속하셨다. 치매 판정을 받았다. 

진료실을 나와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앞으로 병원에 다니며 약물치료를 시작해야 하고, 노인장기요양보험 신청과 당장 지원 가능한 서비스 등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직원이 서류 정리를 하러 자기 자리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는 비용 지불할 게 있다고 생각하시고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여러 장 꺼내셨다. 돈 내는 거 아니라고 말씀드려도 듣지 않으시기에 돈을 뺏었더니 만원 짜리 한 장을 재주껏 빼내시고는 손바닥 밑에 숨겨두시고 직원을 기다리다 건네신다. 당연히 직원은 받지 않았고, 아버지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시다. 다시 또 기다리는데, 아까 센터에 들어오시면서 봐두신 사무실이 있었나 보다. 거기로 가서 다른 직원에게 캐러멜을 주시려고 시도하신다. 따라가서 사무실에 못 들어가게 실랑이를 하다 겨우 자리로 모시고 돌아왔다. 누가 봐도 치매 노인이 되셨다.      


일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같이 탄 여성분에게 캐러멜을 주신다. 아주머니께서 관심을 갖고 내게 몇가지를 물어보셨다.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아주머니께서 먼저 가시지 않고 아버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신다. 먼저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헤어졌다. 걱정해 주시면서 가셨는데, 친절한 분인 것 같았다. 

찻길을 건너 택시를 타야 하는데, 아버지는 끝없이 캐러멜 건네줄 타겟을 찾으신다. 목적지를 향해 가기가 너무 어렵다. 건널목에서는 다른 한 여성분을 타겟으로 삼았다. 실례가 될 것 같아 말렸는데, 횡단보도를 건너 아주머니가 주민센터로 들어가시자 아버지가 따라 들어가시려고 한다. 가까스로 또 말렸다. 


겨우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치매안심센터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대학병원 신경과에 예약을 했는데, 아버지가 건강보험 자격이 아닌 의료급여인 것 같다고 확인해 보라고 한다. 대학병원을 가려면 진료의뢰서를 받아야 하는데, 건강보험 자격이면 동네병원에서 받으면 되고, 의료급여라면 1차로 동네병원에서, 2차로 ‘종합병원’이라는 곳에서, 총 2차례 진료의뢰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버지 종아리의 ‘하지부종’으로 대학병원 예약한 일도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해 보았더니, 거기서는 건강보험으로 확인되는데, 잘 모르겠으면 건강보험공단에 연락해 보라고 한다. 건강보험공단에 전화해 보니 금요일 저녁에 이미 근무시간이 지나서 전화 문의가 불가하다. 고민하다가 그냥 월요일에 대학병원에 가보고, 진료받을 수 없는 상황이면 ‘종합병원’이라는 곳엘 찾아가서 거기서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상의하고 아는 분께 문의해 보며,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주말 이틀 동안에는 계속 공연 연습이 있어서 아버지 댁에 가보지 못하고 전화만 드렸는데, 일어나시는 게 힘드신지 전화를 두 번씩 연속으로 해야 전화를 받으셨고, 말을 점점 잘 못 알아들으신다. 치매안심센터에 갔던 금요일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걸 좀 힘들어하셨는데 점점 더 그러신 것 같다.    

   

월요일, ‘하지부종’ 치료를 위해 오전 9시30분까지 병원에 가야 해서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다. 아버지 모시고 병원 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집을 나서게 하는 일도 어렵고 차 타는 것도 쉽지 않다. 

8시쯤 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자리에 없다. 화장실에 가신 모양이었다. 일 보시고 방으로 들어오셨는데, 아버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주말 내내 아무것도 안 드신 모양이었다. 눈이 퀭하고 살이 쪽 빠졌고, 잇몸 살도 다 빠져서 틀니가 못 붙어 있어 덜렁덜렁하다. 말씀하시는 건 거의 못 알아듣겠다. 나를 반갑게 맞으신 뒤 바로 매트에 가서 누우신다. 집 앞에서 택시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일어나시게 하려고 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하신다. 한 시간 동안 설득하고 실랑이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결국 포기했다. 종아리를 보니 살이 다 빠져서 그런지 물렁물렁해진 것 같았다.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나니, 뭘 좀 드시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엌에 있는 바구니에는 여러 기관에서 기부해 준 즉석식품들이 있다. 이틀 동안 안 드셨으니 곰탕 같은 게 적당하다 싶어 냄비를 씻고 곰탕을 부어 가스렌지에 올렸다. 그런데 불이 안 들어온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고장 난 모양이다. 블루스타를 사와야겠다.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 학동역 근처 대형체인마트에 갔더니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영업 전이다. 근처 수퍼마켓을 검색해 보았다. 가까운 곳을 찾아갔더니 매장이 엄청 크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폐업하여 정리 중이었다. 다시 학동역 쪽으로 돌아오면서 다른 수퍼를 찾아보았는데, 지도에 표시된 곳에 수퍼가 없다.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논현역 근처에 아버지가 자주 가시던 좀 큰 규모의 수퍼가 떠올랐다. 논현역 쪽으로 또 걸었다. 정확한 위치가 생각나지 않아 좀 헤메다가 수퍼를 찾아냈다. 블루스타가 있다. 그걸 사갖고 집에 와서 불을 켜려고 했다. 부탄가스가 기계에 잘 맞지 않는다. 불량품인가? 짜증이 났다. 이렇게 저렇게 조절해 보다가 기계가 맞춰졌다. 마침내 불을 켜고 곰탕을 끓였다. 탁자로 옮겨 놓고 보니 너무 뜨겁다. 그리고 또 떠오른 것은, 혼자 드시라고 하면 안 드실 것 같았다. 다시 즉석식품을 뒤져 삼계탕을 찾았다. 삼계탕도 데웠다. 고기는 못 드실 것 같아, 닭을 헤쳐서 밥을 꺼내 곰탕에 덜어 넣었다. 국이 적당하게 식은 듯하다. 


아버지께 같이 밥 먹자고 했더니, “밥 먹어야지”하고 일어나셨다. 탁자로 오셔서 곰탕과 내 앞에 놓인 삼계탕으로 보시더니 살짝 미소지으며 삼계탕을 보신다. “이거 드시겠어요?” 여쭸더니 밝게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얼른 냄비를 바꿔드렸다. 혼자 닭을 뜯어 드시지 못할 것 같아서 젓가락으로 살을 잘게 찟어 국물에 넣어드렸다. 잘 드신다. 말씀하시는 건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환한 모습으로 삼계탕을 잘 드신다. 그때까지는 먹을 걸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해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식사하시는 동안은 그날 아침 처음 봤을 때의 그 흉한 몰골이 아니었다. 얼굴이고 몸이고 쪼그라들어 어린아이 같았지만, 하얗고 환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삼계탕을 천천히 오랫동안 잘 드셨다. 


아버지는 항상 나와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병원 모시고 가려고 하는 날도, 치매안심센터 가는 날도, 코로나 검사하러 보건소 가는 날도, 함께 식사하던 식당 앞을 지나게 되면 언제나 멈춰 서서 들어가자 하시곤 했다. 

삼계탕을 잘 드셔서 마음이 놓였다. 고기를 드실 정도니 별 문제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는 다시 누우셨다. 아내와 상의하고 알아본 끝에 빨리 요양원으로 모시고, 거기서 치매 등급 신청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내와 요양원에 가져갈,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다. 실내용 신발과 편한 트레이닝 복 등 새로 구입해야할 것들 사고, 식당에서 곰탕을 포장해서 아버지와 점심 같이 먹고 출발할 생각으로 아버지 댁에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동네 거리가 복잡해서 아내는 주차를 하고, 나는 곰탕을 들고 아버지 댁으로 갔다. 아버지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계셨다. 밥 먹자고 말을 건네며 바로 앉히려고 목을 받쳤다. 손에 닿는 느낌이 나무토막 같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깨도 팔도 딱딱하다. 너무 늦게 왔다. 화장실에 가거나 뭘 드시려고 일어났다가 쓰러지신 것 같았다. 치매안심센터 갔었던 금요일에도 힘들어 보이시긴 해도 걸어다니실 수 있었고, 전날에는 밥도 같이 먹었는데, 그렇게 돌아가실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지금도, 마지막 함께 식사하던 모습이 계속 떠오른다. 집에 도착해서 마주했던 모습과 식사할 때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내가 환상을 본 것인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런 특별한 순간이 찾아오는 것인가?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한 달을 다시 더듬어 본다. 마치 퍼즐 맞추기 놀이를 한 것 같다. 2월18일(금) 치매 증상 악화로 인한 치매안심센터 검사 이후 2월22일(화) 예약일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가지 못해서 3월11일(금)로 변경했고, ‘하지부종’ 치료를 위한 3월7일(월) 강남세브란스병원 예약은 코로나 확진으로 3월14일(월)로 변경되었다. 모든 일은 결국 3월11일부터 15일까지 4일 간으로 집중되었다.  


3월11일은 아버지께서 코로나를 앓으시고 격리 해제된 직후여서 치매안심센터 약속을 다시 변경하지 않아도 되었다. 의사가 쉽게 치매라고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는 않았고, 치매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3월14일, 병원 예약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날 아버지 댁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날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 위해 갔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와 식사를 하기 위해 나를 불렀던 것 같다. 코로나 확진 전후로 아버지와 식사를 하지 않았다. 2월에 너무 바쁘기도 했고, 치매 악화로 아버지가 점점 고집불통이 돼가셔서 같이 식사할 마음이 나지도 않았다. 코로나 확진 이후에는 같이 식사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을 몇 주 동안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결국 3월14일 병원 예약은 취소되었고, 나는 아버지와 마지막 식사를 했다.      


지난 설날 이후 나는 아버지에게 초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일주일에 한 두 번 전화드리고, 한 번 정도 찾아뵙고, 너무 바쁘거나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한 두 주 건너뛰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은 아버지를 계속 만날 수밖에 없었고, 코로나 확진 이후에는 매일 전화를 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내가 아버지 옆에 있어야 할 중요한 순간순간에 나는 아버지 댁에 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지난 한 달 동안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시면서 나와 함께 죽음을 향한 퍼즐맞추기 놀이를 하신 것이다. 촉박한 작업 일정으로 지속적인 시간 압박을 받고 있던 나를 꼼짝 못하게 붙들어 두셨고,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할 시간에 중요한 순간순간 그 자리에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내가 도착하기 전에 모든 걸 완벽하게 정리하고 떠나셨다. 내가 일찍 도착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더럽고 냄새나던 아버지는 내게 모든 허물을 벗어버린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시고는, 깨끗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떠나셨다. 지난 한 달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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