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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 Nov 17. 2022

자살률 1위 국가 벗어나기

김누리 작가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를 읽고••••

너무도 병든 사회에서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정상으로 사는 사람은 과연 정상인가요, 비정상인가요?


이번 글감으로 이 도서를 정해놓고 난 뒤에도 유난히 키보드를 두드리기가 어려웠다. 냉소적인 시선을 소개하는 비관주의자처럼 보이진 않을까 또 가장 민감한 부분인 정치적 얘기를 꺼내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그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결국 책의 내용을 우선해 짚어보아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김누리 작가는 중앙대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 독일 유럽학과 교수이다. 독일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독일유럽연구센터의 소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연혁을 이유로 이 책은 독일이라는 거울 앞에 우리를 세워두고 있는 모양새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알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이면을 고스란히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님이 사용하신 독일이라는 거울은 효과적인 대면방법이었다.





정말이지 우리는 참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치 민주화를 이루고, 세상이 놀라워하는 경제 성장도 거두었는데,
우리의 불행은 날로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 세계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 세계에서 노동자의 죽음이 가장 빈번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아이들이 가장 우울한 나라이고, 세계에서 아이들을 가장 적게 낳는 나라이며, 세계에서 모두가 모두를 가장 불신하는 나라입니다. (...)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이룬 이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나요? 왜 이렇게 비참하게 굴종하며 기어야 하나요? 왜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야 할 유년기와 청년기를 이렇게 우울하게 지내야 하나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명확한 이유를 알진 못해도 늘 어렴풋하겐 느끼고 있었다. 이 사회가 기형적이라는 것을.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가 5천만 명 이상인 나라들을 ‘30-50 클럽’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위 그룹에 속하는 나라는 겨우 일곱.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이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큼 눈부신 경제 발전을 거두었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몇 년 동안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자살률 1위 국가. 언제 보아도 가슴이 섬짓해지는 수식어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개인의 죽음을 본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실은 자살이 아니라 벼랑 끝으로 사람을 내몰아놓고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없이 방치한 이 사회의 타살이 아닐까?

삶이 숨이 막히고 버겁다고 느껴지는 건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고통에 필연적인 구조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구할 수 있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이 직면한 사회문제. 그리고 그 문제들의 원인들을 이 지면에서 전부 다루기엔 한계가 있기에 몇 가지를 선별하여 개괄해보도록 하겠다.








이 책의 저자인 김누리 작가님도 그리고 책의 소개 글을 작성하고 있는 필자 역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바는 “그래 대한민국은 역시 헬조선이야” 따위의 비관뿐인 절망이 아니다.


다만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고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해야한다. 자 이제 거울을 제대로 마주할 시간이다.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 동안 노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세게 말을 하자면 한국인은 ‘노동기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노동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인 것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지표에 의하면 독일과 비교해 한국인이 1년에 1000시간을 더 일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독일인보다 1000시간, 5개월 정도 더 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질과 관련해서 좀 더 살펴보면,
한국인의 실제 삶은 지표에 나타나는 것보다도 훨씬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적인 경쟁 교육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우리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동 우울증도 세계최고입니다.

어떻게 ‘우울한 아이’라는 말이 가능할까요?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곳이 놀이터이고, 보이는 모든 것이 장난감 아닙니까.
세상은 온통 경이로운 호기심의 대상이지요. 어떻게 아이에게 우울한 틈이 있나요.
그러나 한국에선 아이들이 ‘기적적으로’ 우울합니다.

단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너무도 우울한 유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 아이들이 우울할까요?
다들 알다시피 너무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 자살예방센터에서 일한다는 분으로부터 아홉 살 아이가 자살한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산업재해 사망률도 정말 심각합니다. 이 또한 우리나라가 압도적으로 세계 최고입니다.
1994년부터 2016년까지 23년간 단 두 번을 제외하고 OECD 회원국 중에서 1위지요.

유럽에서 산재 사망률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이 가장 높았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 달은 영국 정부는 산재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기업에 대한 처벌 수위를 획기적으로 높이면서 산업재해법도 ‘기업살인법’으로 개명했습니다.
정명한 것이지요. 일터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재해’가 아니라 ‘살인’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비용 문제로 환치하는 기업가들의 논리는 살인자의 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기업살인법 제정 이후 영국의 산재 사망률은 극적으로 떨어져서 현재 유럽에서 가장 낮습니다.

한국은 영국보다 산재 사망률,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업살인율이 20배나 더 높습니다.



펼쳐놓고 보자니 무슨 지옥이 따로 없다. 이 뿐만 아니다. 문단에 제시되지 않은 문제들도 우리 사회를 곪아가게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저출생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속도로 심각해지고 있다. 사회문제들은 언뜻 보면 각기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인과관계를 갖는다. 그 탓에 무엇 하나를 손보려고 해도 결국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없게 된다.




이해를 위해 예시를 하나 가져와 보겠다. 저출생의 문제를 한가지의 원인으로만 규명할 순 없지만 위에 제시된 과도한 노동시간 역시 눈초리를 피해 갈 순 없을 것이다. 아이를 키울 여유조차 나지 않는 워라밸 속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고 기를 엄두를 내겠는가. 심지어 이런 어려움 속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잔인한 경쟁 속에 내던져지는 게 그들의 수순이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나라의 아동우울증과 아동자살률 역시 OECD 1위이다.) 그렇게 줄어든 인구수는 또 어떤 문제를 갖겠는가. 노동가능인구가 줄어들고 연금을 내는 사람보다 연금을 받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2040년 이후부터는 전자의 인구수보다 후자의 인구수가 배로 많아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결국 노인빈곤과 노인자살률 역시 이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인식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자기착취를 겸허히 받아드리고 살아간달까. 자기계발과 자기착취는 분명 다른 개념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자기착취를 열정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다. 물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가 걸어온 발자취 탓에 우리는 “빨리빨리” “더 열심히” “남들보다 잘” 살아 낼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곪아터져 튀어나오는 여러 문제들을 치료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임을 더는 부정할 수 없다. 특정세대, 특정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연결되어 직면한 문제임을, 더 이상은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원샷 사회와 텐샷 사회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하는 데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 공동체의 해체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는 OECD 사회관계지수 조사에서 최하위라는 지표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우리가 조금 먹고살기 힘들더라도 사회적 관계, 말하자면 ‘연대의 공동체’같은 것이 살아 있다면 그 안에서 어려움을 함께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깨어진지 오래입니다.
한국 사회가 일종의 세습 자본주의로 굳어져 가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기득권층이 돈과 권력을 독점했지만, 지금은 돈과 권력은 물론 ‘기회’까지도 다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승자 독식 사회가 된 것이지요. 강도가 점점 더 세지고 있는 학벌 계급화 현상도 심각합니다. 청년들, 그러니까 젊은 세대의 좌절은 대부분 이런 학벌 사회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의 해체, 세습 자본주의, 학벌 계급사회 등이
한국 사회를 ‘지옥’처럼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요인들은 왜 생겨난 것일까요?
 
지금과 같은 끔찍한 사회질서를 만들어낸 곳은 바로 여의도입니다.
여의도의 입법부에 속해 있는 300명가량의 국회의원들이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규칙들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300명가량의 국회의원 중에서 290명 정도는 자유시장경제(free market economy)를 지지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극단적인 의회 구성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의원이 우리처럼 98퍼센트에 달하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유시장경제의 낙원이라는 미국도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유시장경제가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곧바로 이념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이념의 차이로 쪼개진 분단국가라는 특성상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한 비판조차 흑백논리로 받아드려지곤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자유시장경제가 본디 지닌 장점까지도 덮어버릴 만큼 큰 해악을 가져온 이유이다. 소위 “빨갱이”로 몰리지 않게 더 극단적인 자본주의에 긍정을 표하게 되는 분위기가 국민들의 뼈 속 깊숙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 탓에 우리는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할 적절한 브레이크를 지닌 사회가 될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브레이크가 아예 없는 자본주의는 야수의 얼굴을 갖는다고 표현한다. 자본주의가 효율적인 체제임은 분명하지만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의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은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시장경제의 효율성은 활용하면서도 야수성은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각을 가진 채 다시 한 번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이 엄청난 불평등과 실업 문제 때문에 지옥으로 치닫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필연적인 결과이지, 특정 정부의 정책 실패 때문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5~8퍼센트의 실업을 내장하고 있는 시스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실업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상당히 효율적인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비용,
 대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실업을 개인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시장경제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실업 문제는 사회의 문제입니다.
실업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돌리는데 들어가는 비용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 철학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실업문제를 기본적으로 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봅니다. (...)

하지만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하는 자들로 국회가 완전히 장악되어 있는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로지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경쟁력만을 외치지 사회적 정의와 인간적 존엄을 외치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독일인들이 한국 사회를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자유 시장경제, 사회 민주주의적 시장경제, 생태적 시장경제 등 그 어떤 경제 체제를 선택할지는 이 글에서 논할 바가 아니다. 이는 수많은 전문가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국민 모두가 여러 시간에 걸쳐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또한 독일의 경우가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그 체제를 따라가야 할 필요와 당위성 역시 없다. 각 나라가 갖는 고유한 특성과 역사가 있고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옷을 입으면 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현존하는 체계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더는 흑백논리로 이를 대해선 안 된다.

더는 지나치게 편향된 야수자본주의에 우리를 맡겨선 안 된다.

완벽할 순 없어도 모두를 지향하는 합의점을 찾아가기 위해선 우리는 오래된 편견이나 학습된 경향성을 집어버리고 문제를 인식해야한다. 그것이 이 책이 쓰여지고 필자가 소개글을 작성한 유일한 이유이다.

이보다 자세하고 깊은 이야기는 책을 통해 감상하길 바란다.

김누리 작가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가 독자들의 시야를 확장시키고 한 꺼풀 성장하도록 만들어 줄 터닝포인트가 되어주리라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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