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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타자기 Oct 20. 2023

우리는 모두 스펙트럼 위에.

비행공포증을 가진 나.

하루 종일 그다음 스케줄을 생각하느라 다른 모든 것을 놓치는 아이가 있다. 하교 버스에서 내리면 1교시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교시가 무엇인지 그리고는 점심 메뉴가 무엇이고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 거의 10초마다 묻고 또 묻는다. 아이는 이미 루틴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스케줄 속에 아주 미세한 변화들, 예를 들어 과목, 점심 메뉴, 하교 버스 번호, 하교 시간의 차이는 그의 불안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원하는 대답도 정해져 있어서, 그것을 기어이 들어야만 잠시 불안이 누그러진다. 본인도 괴롭겠지만, 가끔은 옆에서 대답을 해주는 사람도 지칠 때도 있다.


아이가 자신의 루틴을 반복적으로 확인을 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에도 학교 수업은 이루어져야 한다. 교사는 주어진 교육과정 내에서 다양한 수업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학생의 관심을 옮기기가 쉽지 많은 않다.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자극과 변화무쌍한 재미들이 숨겨져 있는데, 오직 그다음 ‘스케줄’과 ‘루틴’만을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아이의 말속에서 나는 안타까움도 함께 느낀다.


이번 추석은 대체 공휴일과 학교장 재량휴업일까지 연휴가 긴 편이었다. 추석에는 평일에도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나름 비상. 집과 학교에서는 며칠 전부터 그에게 평일에도 등교하지 않는 날이 있다는 것을 반복하여 알려 준다. 아이 역시 반복적으로 학교에 오지 않는 날이 있다는 것을 묻고 또 묻는다. 가끔 답해주기 힘에 부칠 때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거나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해 준다.


그렇게 추석 연휴는 다가왔다. 나는 만 5년 만에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행선지는 괌. 네 시간 남짓의 가까운 여행지였다.


10년 전 신혼여행지였던 하와이에서 돌아오던 날 심한 터뷸란스를 경험한 이후 나에게는 비행공포증이란 것이 생겼다. 원래 고소공포증이 있는 터라 이후 비행기가 아닌 케이블카만 타도 어지럼증이 나를 엄습하기도 했었다.


 출국 일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막상 새벽에 공항을 도착해 비행기를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다행히 괌으로 갈 때에는 터뷸런스가 심하지 않아 안정된 마음으로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돌아올 때였다. 기류가 불안정한 구간이 생각보다 길어 승무원들도 모두 점프시트에 앉아야 했고 그동안은 화장실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요동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테이블에 엎드려 있어야만 했다. 비행기는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나는 오직 비행기의 움직임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했다. 옆을 보니 6살배기 아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영화를 보고 있다. 앞에는 초등학생이 런닝맨을 보며 소리까지 내며 웃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전혀 위험한 상황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탄 비행기가 그대로 추락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나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비행기의 움직임에 쏠려 있었다. 마치 엔진과 내가 한 몸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기분은 예전 여수 바닷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던 케이블카를 탔을 때도 잠시 느꼈다. 남들은 환상적인 외부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나는 아름다운 경관을 즐겨보지도 못하고 오로지 내 속의 두려움에 갇혀 20분 간을 보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 기류가 안정을 찾자 그제야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 움직임에 상관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편안하게 재미있는 영화 내용에 빠져들며 다양한 즐거움을 느끼는데 나는 왜 그럴 수 없는지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 참으로 답답하기도 했다.


비행기가 요동을 치며 흔들리던 동안 나는 잠깐 우리 반 아이를 떠올렸다. 그가 루틴 속의 미세한 변화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나 내가 비행기의 작은 요동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극의 강도의 차이일 뿐, 순간적으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스위치가 일단 한 번 올라가면, 창문이 닫히듯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일 여유는 사라지는 것.


만일 내가 좀 더 편안하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면 세상 모든 곳을 아이와 함께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을 텐데. 아이에게 나의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을 텐데.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연휴는 그렇게 끝났다. 다시 평소의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일상. 다시 만난 아이는 하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 눈을 보고 오늘은 무슨 요일이며, 1교시는 무엇이고 점심 메뉴는 무엇을 먹는지 묻는다. 나는 좀 더 다정하게 아이의 손을 잡고 대답한다. 오늘은 수요일이고 1교시는 교실에서 수업을 할 것이며 점심은 교실에 가서 식단표를 확인해 보자고. 그러자 아이는 안심한 표정으로 확신에 차 말한다. “교실에 가서 확인해 보자!” 나도 힘을 주어 말한다. “그래. 확인해 보자!”




Ps: 실로 오랜만에 쓰는 글입니다. 바쁘기도 했고,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에너지가 고갈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은 바닥을 치면 올라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 에너지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시기, 이제는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보이기 위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나 자신을 위해 글을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글쓰기를 해 나가야겠습니다. 제 글이 조금 우울하더라도, 약간은 탁한 색이 되더라도 그게 제가 느끼는 솔직한 감정이라면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저를 위해선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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