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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조 Mar 24. 2023

파블로 카잘스 _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38

스페인 프로 축구 라리가(La Liga) 리그에는 한일전 축구비길만한 라이벌 매치가 있다. 숙적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로 일명 엘 클라시코(El Clasico, The Classic)라고 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알다시피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 한복판에 있는 스페인의 수도이고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동북부의 광역자치주인 카탈루냐의 주도이다. 스페인 여행을 가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두 도시다. 보통 바르셀로나로 입국해서 마드리드나오거나, 그 반대 여정을 짜기도 한다.


같은 나라의 축구 클럽인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왜 경기만 했다 하면 사생결단을 내려고 할까?


FC 바르셀로나의 본거지 카탈루냐의 역사를 알면 의문이 풀린다.


지금부터 대략 1,200년 전쯤인 서기 801년, 중부 유럽에는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왕국이 있었다. 중부 유럽을 통일한 프랑크는 피레네 산맥(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현 스페인 지역)를 공격하여,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반도 남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 근처 이슬람의 공격에 대비한 변경백을 두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카탈루냐' 지역 정체성의 시초가 되었다.

변경백(邊境伯)_중세 세습 귀족 중, 타국과 영토가 맞닿은 일부 지역의 영주를 특별히 일컫는다. 보통의 봉건 귀족들이 자신들의 봉토에 대해 얻는 권리에 더해, 변경 방위에 대비한 군사권과 자치권이 폭넓게 인정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카탈루냐는 독립 국가로서 실체가 있는 '왕국'은 아니었지만 폭넓은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지역 고유의 전통문화와 언어를 갖는 등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글 맨 아래 참조)에서 지는 편에 서면서 1714년에는 자치권을 잃어버리고 엄청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약 200여 년이 지난 1931년, 스페인에 제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36년 공화주의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반란군을 앞세워 내전을 일으켰다. 


내전 초반 대부분 사람들은 반란이 실패하리라고 여겼지만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돕기 위해 막강한 화력을 동원하여 참전했다. 결국 3년 여에 걸친 전쟁은 반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1939년 정권을 잡은 프랑코 군부독재는 모든 권력을 중앙 정부와 총통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카탈루냐는 또다시 자치권을 잃어버렸다. 카탈루냐어, 카탈루냐 관련 상징물, 카탈루냐 전통문화, 기(旗), 카탈루냐어 지명 등은 모두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스페인은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했고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카탈루냐는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꿈꾸고 있다.


2014년 독립 여부를 결정하는 주민 투표에서 81%의 찬성을 이끌어냈으나, 스페인 정부는 이를 승인을 받지 않은 불법적 선거로 묵살하였다. 2017년 카탈루냐 독립 국민투표에서는 찬성률이 90%를 넘어 자치 정부는 독립을 선언하고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스페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 선언을 무효화했다.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는 수백 년간 이어온 역사전쟁의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축구 한일전보다 더 격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스페인과 스페인 동북부의 카탈루냐 지역



지금까지 엘 클라시코와 카탈루냐 역사 등을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스페인, 1876-1973)때문이었. 그가 바로 카탈루냐 출신이다.


1720년 이른바 '걸작의 숲'의 나이에 들어선 서른다섯 살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독일, 1685~1750)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작곡했다. 솔로 첼로를 위해 쓰인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첼로의 성서'라고 불리기도 하는 곡이다.


하지만 이 곡은 거의 200여 년간 별로 연주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가치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곡을 세상에 알리고 명곡의 반열에 올려놓은 장본인이 바로 파블로 카잘스이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대한 설명을 시작할 때면 항상 파블로 카잘스의 일화로 시작하는 이유이다.



1889년 고향을 떠나 바르셀로나 시립음악학교에 유학하고 있던 열세 살 소년 카잘스는 시골에서 자기를 보러 온 아버지로부터 풀-사이즈 첼로를 선사받았다. 마음이 들뜬 카잘스는 내친김에 아버지와 함께 악보를 사러 부둣가 고악보서점에 들렀다.


이것저것 뒤적이던 카잘스는 오래돼 변색되고 구겨진 악보 다발을 발견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악보 뭉치였다. 카잘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 역사적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첼로만을 위한 곡이라니! 나는 놀라서 그걸 바라보았습니다. 첼로 독주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떤 마술과 신비가 이 언어 속에 숨겨져 있을까?(1)


이후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곡을 분석하고 연습했다. 무려 12년이나 그렇게 연습하여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청중 앞에서 여섯 곡 중 한 곡을 연주했다. 


전곡을 녹음한 것은 그로부터 또다시 삼십오 년이나 지난 1936년, 그의 나이 60세가 되어서였다. 그는 97세로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 곡을 연습했다고 한다.


바흐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탄생시켰고 카잘스는 그것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연습하여 부활시킨 것이다. 



카잘스는 예술인들뿐만 아니라 온 세계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 이유가 단지 음악적 성취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예술가로서 그리고 예술가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일관되게 보여준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지지 때문이다.


1939년 스페인에 프랑코 군부독재 정부가 들어섰을 때 카잘스는 카탈루냐의 북쪽에 있는 남프랑스 '쁘라(Prades)'라는 작은 마을로 망명했고 항의의 표시로 공식 연주를 중단했다. 그리고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세계 각국의 지인과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선 연주회를 여는 등 독재를 피해 오는 난민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정의에 대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든 영예와 안락한 삶을 과감히 포기'(2)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이 넘은 때였다.


그는 1971년 UN평화메달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평생을 아름다움과 진실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불행히도 카잘스는 프랑코 독재의 종말(1975년)을 보지 못하고 1973년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살아생전 선언대로 스페인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나서야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79년 고향인 카탈루냐 벤드렐로 유해를 이장한 것이다.



법정스님도 카잘스를 흠모했던 모양이다. 스님은 텅 빈 충만』이라는 책에 '파블로 카잘스'라는 글을 썼다.

카잘스는 단순히 첼로 연주가만은 아니다. 작곡과 지휘도 함께 했지만, 97년의 그의 긴 생애를 통해 파시즘에 핍박받는 동족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세계평화를 추구한 위대한 인류의 양심이었다.(3)


고요한 산사(山寺)의 밤, 순수의 공간에서 카잘스 첼로를 듣는 스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도 한 번 스님 흉내를 내보고 싶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모음곡 6개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리고 각 모음곡은 1개의 전주곡(프렐류드)과 5개의 춤곡 등 6곡 (프렐류드-알르망드-꾸랑트-사라방드-미뉴에트(혹은 부레 또는 가보트)-지그)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 총 36 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 2 시간이 넘는 긴 곡이다.


처음부터 전곡을 다 듣기는 힘들다. 제일 유명한 1번 모음곡(약 16분)을 여러 번 들어보고 다른 곡으로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https://youtu.be/UuQZ8VuZTSA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https://youtu.be/DZGrH1Hz7J4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6번 전곡



인용   (1)『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엘버트 칸 엮음, 김병화 옮김 69p.

           (2) 위의 책 18p.

           (3) 『텅 빈 충만』법정 씀 30p.

참고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엘버트 칸 엮음, 김병화 옮김]

           [들으면서 익히는 클래식 명곡, 최은규]

           [더 클래식 하나, 문학수]

           [이 한 장의 명반, 안동림]

           [카탈루냐, 인터넷_나무위키 ]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

스페인합스부르크 왕조(당시 합스부르크가(家)는 스페인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로 양분되어 있었다)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는 후사가 없었다.(극심한 근친혼의 영향?) 그는 프랑스의 앙주 공작 필리프(카를로스 2세의 누이인 마리 테레즈와 프랑스 루이 14세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의 아들, 즉 루이 14세의 손자)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는 프랑스 왕손이 스페인 왕이 되면 프랑스 스페인이라는 거대 단일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이들은 프랑스의 필리프 대신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대공을 스페인 왕으로 밀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말이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지 거의 전 유럽(프랑스+스페인 VS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이 휘말린 전쟁이었다. 십 년을 훌쩍 넘긴 전쟁은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 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후손들이 프랑스의 왕이 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는 스페인 왕 펠리페 5세로 즉위했다.


이 전쟁에서 끝까지 펠리페 5세의 즉위에 반대했던 카탈루냐는 결국 자치권을 박탈당하고 엄청난 탄압을 받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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