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조 Feb 25. 2022

가라, 내 마음이여! _ 베르디<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22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구약성서 '다니엘서'를 배경으로 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Nabucco>에 나오는 노래다.


기원전 586년 신(新)바빌로니아(BC 626 ~ BC 539)는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유대 민족들을 포로로 잡아 수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이 사건을 '바빌론 유수(幽囚)'라고 하는데 유대인 포로들은 거기에서 70년간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다. 이때 신(新)바빌로니아의 왕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Ⅱ. 당시의 이탈리아어로 하면 나부코돈노소르 Nabuccodonosor인데 오페라에서는 간단히 <나부코 Nabucco> 했다.

히브리(Hebrew)_히브리는 '가로지르다’, ‘건너가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큰 강을 건너 이주해 왔음을 시사하는 말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이프성경사전, 2006.)
유수(幽囚)_잡아 가둠 (유(幽)-그윽하다, 깊다, 가두다    수(囚)-가두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Va, pensiero, sull'ali dorate)라는 노래 가사는 구약성서 '시편' 137장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포로로 끌려와 억압과 노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이 바빌론의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애절한 노래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배경이 되는 바빌론과 예루살렘 지도



쥐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이탈리아 1813~1901)가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 Nabucco> 를 작곡한 때는 1842년. 우리 나이로는 '서른, 잔치는 끝'난 듯했다. 1838년에 첫째 딸 비르지니아 (Virginia)가 죽었고 다음 해에는 둘째인 아들 이칠리오(Icilio) 역시 죽었다. 그리고 또 다음 해인 1840년에는 아내 마르게리타 (Margherita)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삼 년 동안 아내와 아들 딸 등 세 가족을 모두 잃은 것이다. 베르디의 나이 이십 대 끝자락이었다. 이 고통의 와중에 희극 오페라 <하룻 동안의 왕>을 썼으니 실패할 수밖에. 치욕적 수모라고 할 만큼 처참하게 무너졌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저주받은 듯한 삶의 고통에 신음하던 그에게 <나부코>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보이지 않는 큰손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o Merelli)의 의뢰였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온 베르디는 리브레토(오페라 대본)를 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라는 가사가 마음속에서 공명한 것이다. 이내 마음속 고통과 슬픔은 아름다운 선율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선율은 훗날 이탈리아 역사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과 함께 하면서 ‘신화’의 반열에 들어갔다." 1)


이탈리아 출생(1946)의 쥐세페 시노폴리가 도이체 오퍼를 지휘한 1982년 녹음 CD. 시노폴리는 2001년 베르디 <아이다>를 지휘하다 3막 연주 때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노래의 운명은 작곡가나 가수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기도 해요. 그 운명은 가수가 아니라 대중들에 의해 만들어 지지요." 가수 양희은이 어느 토크 프로그램에서 노래 <아침이슬>과  관련해 했던 말이다. <아침이슬>은 양희은의 의지와 상관없이 민주화 운동의 상징 노래가 되었다.


베르디 역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공식 노래가 되고, 민족의 노래가 되어 제2의 국가처럼 불리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나부코>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1842년,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나라로 분열된 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였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조국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던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디는 만년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인 음악가들을 위해 밀라노에 ‘휴식의 집’이라는 양로원을 세웠다. 그리고 1901년 1월 27일, 베르디는 자신의 장례를 음악 없이 간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 마차는 유언대로 십자가 하나만을 달고 밀라노 공동묘지로 향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은 베르디를 이렇게만 보내고 말 수는 없었다. 그가 죽은지 한 달쯤 뒤 그가 세운 ‘휴식의 집’ 묘지로 그의 관을 옮기면서 성대한 장례를 치른 것이다. 자그마치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장례 행렬에 함께했고, 토스카니니의 지휘 아래 8000여 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시민들이 합세한 떼창이 되어 밀라노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나부코> 공연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이 나오면 모두 기립하고  앙코르를 요청한다고 한다. 이 곡은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 중에 앙코르가 허용된 유일한 곡이다.



https://youtu.be/ntflUU_xmqY

  제임스 레바인(미국 1943~)이 지휘한  메트로폴리탄 공연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공연 중에 앙코르 한다

조국을 빼앗긴 자들의 이심전심. 장중한 분위기의 합창이 깊은 울림과 벅찬 감동을 준다.



'바빌론 유수(幽囚)'를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유명한 노래가 있다. 보니엠 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다. 보니엠은 서인도 제도 출신 흑인 여성 3인 남성 1인으로 구성된 혼성 4인조 그룹이다. 이들은 유로팝과 디스코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자메이카의 토속 음악인 레게(Reggae) 리듬을 접목한 노래로 디스코 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대중음악에서는 레게의 유행을 '자메이카의 침공'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심지어 보니엠은 1978년 서구 팝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금단의 지역인 구 소련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을 정도였다.

서인도 제도


보니엠의 노래들은 밝고 경쾌하다. <Rivers of Babylon>도 '바빌론 유수'라는 슬프고 무거운 주제를 노래하지만 역시 밝고 경쾌하다. 구약성서 '시편' 137장 내용을 노골적으로 인용했지만 히브리인들의 조국에 대한 향수와 탄식에만 머물지 않았다. <Rivers of Babylon>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를 염원하는 노래이다.


https://youtu.be/UB4OKEYqCCc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유를 염원하는 노래 Boney M의 <Rivers of Bybylon>
시편 137장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인용   1) [나부코, 이탈리아의 역사를 품은 오페라,  음악학자 정이은]

참고   [보니엠 https://blog.naver.com/naenang/222616928484, 내냉 뮤직]

매거진의 이전글 때로 음악은 정치적이다 _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