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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조 Jun 24. 2023

전쟁에 희생된 두 형제의 비극_<태극기 휘날리며>OST

아버지는 인서울 하셨다

두 달 전쯤 아버지 묘를 이장(移葬)했다. 정확히 말하면 묘지를 옮긴 게 아니라 유골을 동작동 현충원에 모셨다.


아버지는 40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때만 해도 화장(火葬) 문화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었고 집 뒤에 선산이 있어서 그곳에 모셨었다. 그런데 마을 일대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멀찌감치 강화로 이장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다.


어릴 적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버지는 거뭇하게 일그러진 팔뚝 흉터보이시며 6.25 때 총탄에 맞았던 상처라 자랑삼아 이야기하셨었다. 아버지 나이를 역산해 보니 기껏해야 열여덟  전쟁터 나갔던 거였.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형은 아버지가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으로 제대했었다는 사실 나보다 훨씬  자세히 알고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제대 관련 문서를 마치 무슨 가보(家寶)라도 되는 것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작년에 형은 제대 문서를 근거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필요한 서류를 내는  아버지를 국가 유공자로 지정하기 위해 바빴다. 결국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셨다. 현충원에 들어가실 수 있게 된 거였다.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다. 불구덩이(화장로)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다며 화장하지 말고 매장해 달라고 당부하시던 엄마도 돌아가시면 아버지 옆에 들어가실 수 있다는 말에 그 무서운 화장도 감내하시겠다는 눈치였다.  



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시는 데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첫째 날에는 묘지를 개장하고 유골을 수습해서 화장을 했다.


형은 이장(移葬) 같은 산(山) 일은 윤달에 하는 거라며 4월 중순에 날짜를 잡았다. 음력으로 윤 2월 막바지였다.


나는 파묘(봉분을 걷어내는 과정)할 때는 몰라도,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은 좀 경건하고 엄숙한 장면이 될 걸로 기대했다. 눈물도 주르륵 흐를 줄 알았다. 영화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만에 만난 십여 명의 친척들은  산소를 파내고 있는 와중에도 한쪽에 모여 깔깔거리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씨는 미세먼지도 없이 맑고 청량했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산소를 고 유골을 수습한다는 다소 무겁고도 조금은 무서울 듯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음식 솜씨 좋은 형수가 바리바리  온 김밥과 과일과 커피, 심지어는 수육과 전까지 펼쳐놓자 분위기는 완전히 가족 소풍을 나온 것처럼 되었다.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한다는 인부들의 삽질은 노련했음에도 연신 땀을 흘렸다. 그들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두런거렸다.


"꽤 깊이 팠는데 아직도 안 보여"

"이 나무뿌리는 대체 어디서 온 거야?"

"흙은 좋네, 물도 안 차고"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요."  

"힘드실 텐데 막걸리 한 잔 하고 하세요."

  ~

  ~

"나왔다~!"

삽질하던 두 인부가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좋아하며 소리쳤다.


형과 나는 쪼그리고 앉아  유골을 수습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기대했던 눈물도 나지 않았다. 누나가 훌쩍이며 지켜보았다.


유골 수습이 끝나고 다 함께 절을 올리는데 일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조카딸이 농담을 했다.


"할아버지 인서울 하시는 거네~?!" 


식구들이 한바탕 웃었다.



화장장은 우리처럼 조상의 묘를 개장해서 화장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윤달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화장이 시작되자 누나는 화장로(火葬爐)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창문에 기대서서 오래도록 기도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누나를 자주 놀리며 장난치하셨었다. 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나름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아버지는 딸바보였을 것이다. 


형은 오래도록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을까. 아버지는 하필이면 형의 대입 시험 바로 전날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형은 시험을 포기해야만 다. 그 기막힌 우연원망했을까?  생각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형과 누나를 멀뚱하니 바라보았다.



다음날 현충원 안장식(安葬式)은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뻣뻣하게 일어서고 걷고 방향을 바꾸각 잡힌 군인 의장대의 행동은 재밋거리기도 했지만 의식의 격을 높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절차와 형식적인 행동은 유가족들에게 '예우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형식이 없으면 아예 내용을 담을 수 없는 경우가 다. 스마트폰이라는 형식이 없으면 수많은 앱(App)들 무용지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헌화와 묵념, 예포 발사(포는 아니고 소총 발을 쐈다) 그리고 행렬과 안장으로 이어진 의식을 마치고 


아버지는 인서울 하셨다.

     

현충원 안장식 및 행렬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2004년 2월에 개봉하여 한국 영화사 두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의좋고 푸르디푸른 형제가 어느 날 벼락이라도 맞듯이 6.25 전쟁에 다. 형제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함께 또는 심지어 적군으로 싸우다가 결국 서로 헤어진 채 휴전을 맞았다.


그리고 50년,

남쪽에서 살아남아 이제나 저제나 형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살던 동생은 속절없이 늙은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동생은 그토록 애절하게 그리던 형을 만나게 된다. 속에 묻혀 백골이 된 형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왜 이러고 있어요.
말 좀 해요.
~
형~!
형~!


모든 관객이 울었다.



영화 제목은 태극기 부대 홍보물 인듯한, 또는 반공 애국 영화인 듯한 선입견을 물씬 풍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멋모르고 전쟁에 끌려가 희생된 두 형제 또는 가족의 비극과 아픔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안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 형제가 남북을 은유한다는 평도 있지만 지나친 의미 부여다. 영화의 영어 제목도 <Brotherhood of War>다. 영화 주인공 진태(장동건)는 통일, 조국, 반공 따위에는 관심 없다. 오로지 동생 진석(빈)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뿐이다.




제규 감독은 실감 나는 전투 장면 촬영을 위해 국방부의 제작 지원을 요청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는 진태와 진석 형제가 국방군에 자원입대하는 것으로 바꾸자는 등 몇 가지 대본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강제규 감독은 거절했다. 반공 애국영화로 변질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영화를 만들면서 국방부의 제작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영화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군복과 소총부터 탱크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모든 소품 하나하나를 자체 제작하거나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더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국방부의 제작 지원 없이 영화를 찍었다. 강제규 감독의 의지와 뚝심이 '배달의 기수' 같은 군 홍보 영화로 전락할 뻔한 영화를 살려냈다.



영화음악가 이동준이 <태극기 휘날리며> 에필로그 OST 작곡했다. 


마음을 쓰다듬잔잔하게 흐르는 멜로디가 애처롭다. 눈시울을 붉히다가 끝내는 울컥 눈물을 쏟게 된다.


전쟁에 희생된
가엾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진혼곡이다.


https://youtu.be/2 fROeeInPJ8

영화음악가 이동준이 작곡한 <태극기 휘날리며> 에필로그 OST



5천만을 울린 <태극기 휘날리며>의 역대급 명장면


https://youtu.be/OZ2 QFLS8 FD4

5천만을 울린 <태극기 휘날리며>의 역대급 명장면



영화 관련 사진 출처_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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