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쯤에 아버지 묘를 이장(移葬)했다. 정확히 말하면 묘지를 옮긴 게 아니라 유골을 동작동 현충원에 모셨다.
아버지는 40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때만 해도 화장(火葬) 문화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었고집 뒤에 선산이 있어서 그곳에 모셨었다. 그런데 마을 일대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멀찌감치 강화로 이장했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어릴 적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버지는거뭇하게 일그러진 팔뚝 흉터를 보이시며 6.25때 총탄에 맞았던 상처라고자랑삼아이야기하셨었다.아버지 나이를 역산해 보니기껏해야 열여덟살에 전쟁터에 나갔던 거였다.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형은아버지가 전쟁에나갔다가 부상으로 제대했었다는 사실을나보다 훨씬 더자세히 알고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제대 관련 문서를마치 무슨 가보(家寶)라도 되는 것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작년에 형은 그 제대 문서를 근거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필요한 서류를 내는등아버지를 국가 유공자로 지정하기 위해 바빴다.결국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셨다. 현충원에 들어가실 수 있게 된 거였다.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다. 불구덩이(화장로)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다며 화장하지 말고매장해 달라고 당부하시던 엄마도 돌아가시면 아버지 옆에 들어가실 수 있다는 말에그 무서운 화장도 감내하시겠다는 눈치였다.
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시는 데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첫째 날에는 묘지를 개장하고 유골을 수습해서 화장을 했다.
형은 이장(移葬)같은 산(山) 일은 윤달에 하는 거라며 4월 중순에 날짜를 잡았다. 음력으로 윤 2월 막바지였다.
나는 파묘(봉분을 걷어내는 과정)할 때는 몰라도,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은 좀 경건하고 엄숙한 장면이 될 걸로 기대했다. 눈물도 주르륵 흐를 줄 알았다. 영화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만에 만난 십여 명의 친척들은 산소를 파내고 있는 와중에도 한쪽에 모여 깔깔거리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씨는미세먼지도 없이 맑고청량했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보였다.산소를 열고 유골을 수습한다는 다소 무겁고도 조금은 무서울 듯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음식 솜씨 좋은 형수가 바리바리 싸 온김밥과과일과커피, 심지어는 수육과 전까지 펼쳐놓자 분위기는완전히가족 소풍을나온 것처럼 되었다.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한다는 인부들의삽질은노련했음에도 연신 땀을 흘렸다. 그들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두런거렸다.
"꽤 깊이 팠는데 아직도 안 보여"
"이 나무뿌리는 대체 어디서 온 거야?"
"흙은 좋네, 물도 안 차고"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요."
"힘드실 텐데 막걸리 한 잔 하고 하세요."
~
~
"나왔다~!"
삽질하던 두 인부가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좋아하며 소리쳤다.
형과 나는 쪼그리고 앉아 유골을 수습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기대했던 눈물도 나지 않았다. 누나가훌쩍이며 지켜보았다.
유골 수습이 끝나고 다 함께 절을 올리는데 일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조카딸이 농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