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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조 Feb 02. 2023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_생상스 <죽음의 무도>

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36

지난 연말과 올해 초에 걸쳐 사상사 연구자인 김영민 교수의 책 두 권을 내리읽었다. 아내가 먼저 읽고 추천해 주어서 읽게 된 책들인데,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는 이 책들을 읽으며 킥킥대고 웃다가 나를 불러 '여기 좀 읽어'라며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글을 써'라면서 감탄했다. '깊이 있는 내용도 김영민 교수가 쓰면 재미있어. 모름지기 글은 이렇게 써야지'라면서 무미건조한 내 글을 은근히 타박하기도 했다.


아내가 읽어보라는 부분 중 일부이다

먹는 일은 단순히 마음 문제만은 아니다. 문명 전체와 관련이 있다. 문명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밥상머리에서는 식탐의 긴장과 공포가 감돈다. 어떤 이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음식을 덮친다. 뭐든 갈비 뜯듯이 먹는다. 밥도 초콜릿도 아이스크림도 뜯는다. 커피도 뜯어 마신다. 음식을 흘리고 괴수처럼 울부짖는다. 
<중략> 
특히 선짓국을 그렇게 먹고 있으면 흡혈귀 같아 보이니 조심해야 한다. 누군가 과도한 식탐을 부리면 식사 후에 점잖게 묻는 거다.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오셨어요?"_[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276p.~277p.


돼지 목살을 먹어보고 나서야 돼지에게 목이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_[같은 책] 279p.


눈물을 찔끔댈 정도로 웃던 아내가 이해가 됐다. 그리고 아내에게 서늘하 마디 던지며 김영민 교수 책을 읽어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여보, 식탐은 나보다 당신이 한 수 위 아닌가?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오셨어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므로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고 한다.


혹시 득도(得道)의 경지에라도 이르겠다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가 에필로그에서 내놓은 한 가지 방법은 김영민다운 반전이었다. 바로 목적 없는 산책이다. 운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꽃을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며 쓰레기를 버리려 나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오르막은 하나의 과제처럼 여겨지므로 가급적 평지를 산책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쉽고도 좋은 방법이다. 나도 걷기 운동을 하고 있으니, 이제 '건강을 위해서'라는 목적을 버리고 걸어볼까?



이 책에는 '죽음과 함께 춤을 추다'라는 꼭지가 있다. 중세 후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그림 '죽음의 춤(danse macabre)'에 대한 이야기이다. 14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유행하여 당시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쯤인 2500만~3500만 명이 손을 쓸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인구의 20% 정도가 죽어 나간 나라는 운이 매우 좋았던 거고, 운이 나빴던 나라는 80%나 죽었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사람들은 귀족과 평민, 부자와 빈자, 신실한 성직자나 용맹한 기사, 어른이나 아이, 심지어 왕이나 교황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삶과 죽음이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종교도 무용지물, 희망을 찾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 불안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두려움을 잊으려 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 '죽음'과 '춤'은 이런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독특하고 괴기스러운 '죽음의 춤'이라는 그림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죽음의 춤>(왼쪽)은 산 자와 죽은 자(해골)가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그렸고, <죽음의 춤; 아이>는 유모가 졸고 있는 틈에 해골이 아기를 데려가는 그림으로 '어린아이도 죽음에서는 예외가 아님'을 경고하고 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64p. 81p.)

작자 미상의 <죽음의 춤> 16세기(왼쪽), 다니엘 니콜라우스 호도비에츠키의 <죽음의 춤; 아이>, 1791



카미유 생상스 Camille Saint-Saens (1835~1921)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가 죽었을 때 국장을 치르며 애도했다.)


그는 3살에  피아노를 치고, 5살에 작곡을 시작 대단한 천재였다. '모차르트가 다시 태어났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10살 때는 피아노 무대에 데뷔했는데 연주를 마치고 관객들이 앙코르를 외치자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 중 아무 번호나 불러주시면 연주하겠습니다"라는 당돌한 대답을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생상스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작곡가 같지만 사실 알게 모르게 듣고 있는 그의 음악은 여럿 있다.


교향곡 중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오르간 연주가 감동적인 <교향곡 3번, 오르간>이 있고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좋아하는 레퍼토리이다. 또한 발레와 첼로 독주곡으로 귀에 익은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도  곡이다.


특히 전설이 된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미국, 1923~1977)가 부른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의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노래다.



생상스가 1874년에 작곡한 <죽음의 무도>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의사 시인 앙리 카잘리스 Henri Cazalis(프랑스, 1840~1909)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교향시이다.


카잘리스는 중세 후기 사람들이 흑사병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괴담과 그림을 보고 평등한 죽음의 잔치를 벌이는 시를 썼다.

지그, 지그, 지그, 박자에 맞춰 / 죽음은 발꿈치로 무덤을 박차고 나와 춤춘다 / 한밤중에 죽음의 춤을 시작한다 / 지그, 지그, 지그,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 겨울바람이 불고, 밤은 어둡고
<중략>
쉿! 갑자기 춤을 멈추고 / 서로 밀치며 날래게 도망친다. 새벽닭이 울었다. / 오, 불행한 세계의 아름다운 밤이여! / 죽음과 평등이여 영원하여라!



예전에 출근길 차 안에서 곡명을 모른 채 연주를 들었었다. 왈츠곡인 것 같긴 했는데 일반적인 3박자 왈츠와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템포가 무척 빨랐고 바이올린 협주 같기도 했다. 끝부분에서는 웅장한 스케일로 천둥처럼 치닫다가 갑자기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알게 된 곡명은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아, 이게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가 배경음악으로 썼던 그 곡이라고?' 분명 김연아의 피겨 연기를 보았을 텐데. 아마 그때는 신비롭기까지 한 김연아의 피겨 연기에 빠져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듯하다.



하프의 12번의 피치카토 연주자정을 알리자 공동묘지의 해골들은 마치 클럽에라도 온 듯이 무덤을 박차고 나와 즐겁게 춤을 춘다. 지위고하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 그렇게 신명 나게 춤을 추다가 새벽닭이 울자(끝부분의 오보에 연주) 서로를 밀치며 황급히 무덤 속으로 사라진다.


https://youtu.be/NerhU6 CROd4

폭발적인 힘을 쏟아내며 절정으로 치닫는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한 <죽음의 무도>



<죽음의 무도>를 배경음악으로 한 김연아의 2008 그랑프리 파이널 쇼트 프로그램 연기


https://youtu.be/0qMW8ZJsU_c




글의 제목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림 출처 _  네이버 이미지

참고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들으면서 익히는 클래식 명곡, 최은규]

          [이 한 장의 명반, 안동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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