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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성조 Oct 09. 2024

몽골 3일 차. 욜링암

윈도우 바탕화면 속으로

 여행 셋째 날, 하얀 게르에서 눈을 뜬 첫날 아침이다. 나름 생애 처음으로 해 본 경험이라 어떻게든 감성을 쥐어짜 보려고 안 쓰던 수첩과 펜까지 꺼내 보았는데 이상하게 딱히 할 말이 생각이 안 난다. 어제 별 보느라 감성을 모두 다 써버린 건가? 지금 생각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행 첫날 몽골 공항에서 떨궈서 잃어버린 불쌍한 내 한국 유심.

 

 일단 몽골 현지 유심으로 인터넷을 쓰긴 하는데, 귀국 후에는 어쩌나? 인천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데 별 탈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스마트폰 없이 공항에서 집에 가는 것뿐인데.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척이나 큰 미션을 받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출연자가 된 것 같다.


 별 쓰잘데기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는 출발 일정이 바빴다. 씻고 밥도 먹어야 하고 또 열심히 반나절은 달려야 할 테니. 빠르게 수첩은 접어두고 게르 문을 여니 밖이 꽤 소란스럽다. 공용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씻고 있는 숙박객들도 보인다. 부지런한 가이드 시내는 우리보다 벌써 한참 전에 일어난 것 같다. 쟁반 가득 아침식사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래, 한국에서 여행 패키지를 예약할 때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가이드가 식사를 준비해 준다고 했었지? 몽골 투어에서 식사는 크게 여행자 캠프 식사가이드 식사 두 종류로 나뉜다. 여행자 캠프에 딸려있는 식당에서 준비해 주는 캠프 식사는 실내 시설이 깔끔하게 갖춰져 있고 위생적이며, 대개 샐러드로 시작해서 티로 끝나는 양식류가 많다. 결정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훨씬.

시내 가이드는 노랑 접시에 조식을 준비해 준다.

 고로, 지갑이 깃털인 나는 별 고민도 않고 가이드가 직접 재료를 사고 요리를 해주는 프로그램을 택했다. 아무거나 막 먹어도 멀쩡한 강철 배와, 일단 입에 뭘 집어넣으면 뭐든 맛있고 보는 무딘 입맛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약간의 고생을 감수하고 내린 선택이었는데, 막상 몽골에 와 보니 생각보다 꽤나 훌륭한 결정이었다. 첫째로, (이건 정말 오로지 가이드 운빨이긴 하다만) 시내의 요리 실력이 정말 좋았다. 나는 여행 중에 '한국에서 평생을 산 내가 만든 제육볶음이, 어째서 몽골인 가이드가 만든 제육볶음보다 훨씬 맛이 없는가'에 대한 진지하게 고찰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 입맛은 예민했다. 가리는 음식이 없다고 자만(?)했으며, 입에다가는 맛있다는 말을 달랑달랑 달고 살았던지라, 몽골 양고기가 입에 안 맞을 줄은 몰랐다.


 질기기도 했을뿐더러,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향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달까? 다양한 몽골 현지 음식을 경험한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지만, 삼시세끼 여행자 캠프에서 몽골 음식만 먹었다면 아마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깐 그건, 유럽 여행에서 한식을 찾던 어른들을 이해하게 된 첫 순간이었다. 여행은 무조건 현지 음식이라며 한식을 구태여 챙겨 먹는 누군가를 유난스럽다 여겼던 고정관념이 깨진 순간이기도 했다.


 가이드가 뚝딱 만들어주는 매콤한 찌개, 미역국, 라면까지 모든 음식들은 고된 여행을 이어나가는 힘이 되었다. 끓어오르는 사막 한복판과 초록빛 들판 한가운데서 끝내주는 장관과 함께 밥 한 끼 하는 캠핑 감성은 덤이고 말이다.  


 오늘의 메뉴는 식빵에 소시지, 계란 프라이와 오이 방울토마토 샐러드. 식빵은 한국 식빵보다 크기가 더 작고 수분기 없이 퍼석한 느낌이어서, 맨 빵으로 먹기보다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게 더 맛있었다.

 시내가 가져다준 악마의 누텔라나 과일잼을 듬뿍 발라 먹기도 하고, 햄과 계란 야채까지 모두 얹어 든든히 식사를 마쳤다. 여행 중 절반정도는 이렇게 비슷비슷한 서양식 조식을 먹었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참, 음식들은 색색깔의 플라스틱 식기에 담겨 나오는데, 이동시 무게나 가격 등의 이유로 플라스틱 식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헬로 키티 주방놀이 세트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요즘은 건강이나 위생 문제로 점점 캠핑용 스테인리스 식기를 사용하는 여행 프로그램도 있다던데 막상 다 바뀌어 버리면 아쉬울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오늘의 트레킹 목적지는 욜링암. 욜링암의 '욜'은 독수리를 의미하고 '암'은 계곡을 의미한다. 욜링암 골짜기 입구 모양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고,  '큰 독수리가 많이 살고 있는 계곡'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얼음 계곡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일 년 내내 계곡에서 얼어 있는 얼음을 볼 수 있어서 붙은 별명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계곡에 깊이 들어가면 한 여름에도 두꺼운 얼음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온난화 때문에 여름에는 얼음이 녹고, 가을이 시작될 때쯤부터 다시 얼기 시작한다.


 욜링암의 위치는 지금 있는 차강 소브라가에서 약 20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별 이상이 없다면) 예상 이동시간은 4~5시간 정도. 놀랍게도 길 위에는 우리를 멀미로부터 구해 줄 아스팔트도 깔려있다. 아! 아름다운 아스팔트! 행복하다. 어제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귀여운 일정이라 한시름 놓았다.


 게다가 좋은 소식 하나 더. 오늘은 욜링암에 도착하기 전 '달란자드가드'라는 도시에 들러 잠시 쉬고, 점심으로 피자도 먹는다고 한다. 얼음이 든 콜라랑 아메리카노도 함께! 몽골에서 피자라니! 아! 아름다운 피자!


 3일 만에 인간이 이리도 단순해지다니. 결핍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도 있나 보다. 별거 아닌 게, 별거 아닌 게 된다! 녹아버린 욜링암 걱정보다, 오늘 점심에 먹을 피자가 더 기쁜 게 맞나 싶지만 입꼬리가 자꾸 스멀스멀 올라갔다.

좌- 달란자드가드 초입. 아스팔트가 아름다워 보이기는 또 처음이다.  중- 몽골 피자는 맛있다. 우- BTS의 위력. 가게에 떡하니 방탄소년단의 포스터가 있었다.


 밥도 다 먹었겠다 이동하는 와중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르에 도착해서도 빗방울은 그치지 않았다. 몽골에서 보는 첫 비다.


 몽골에서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의아했다. 하지만, 흔치 않은 경험이기도 해 신기했다고 적은 건 사실 뻥이고, 솔직한 마음으로다가 여행지에서의 비는 황금연휴 전날 회식자리만큼 피하고 싶고 만나기 싫고... 뭐 그렇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비 오는 대로 또 재밌는 일이 생기기를 바랄 수밖에!  


 몽골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름은 우기라 당연히 때때로 비가 내린다. 국토가 워낙에 넓어 기후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륙국이기 때문에 손톱 아래가 수분기 없이 쫙쫙 갈라질 만큼 건조하다. 연교차와 일교차도 편이다.

 열흘간의 몽골 여행동안 따땃한 봄과 극한의 여름, 시원한 가을바람과, 초겨울의 입김까지 모두 겪을 있었다. 반팔부터 두꺼운 겉옷까지 가방에 무리해서 쑤셔 넣어가며 쟁인 건, 정말이지 참 잘한 같다.


 오늘 일정은 욜링암 계곡 트레킹 체험. 일정 중에 승마 체험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속에서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시내는 비가 꽤 오고, 협곡이 추울지도 모른다며 단단히 대비하라고 일러주었다.


 헬스장 갈 때 주구장창 입는 스포츠 레깅스부터 신고, 기능성 티셔츠 위에 방수가 되는 바람막이를 한 겹 더 장착했다. 푸르공 안에서 신던 구멍 숭숭 뚫린 샌들 대신 트레킹을 위한 운동화로 갈아 신었고, 마지막으로 내리는 비를 막아 줄 턱끈 달린 모자까지 채비를 마쳤다. 



 욜링암을 다시 떠올리면 협곡에 들어온 순간 보았던 첫 풍경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몽골로 떠났던 이유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 바로 그 풍경.

이게 바로, 윈도우 바탕화면?


 풍문으로만 전해 듣던 윈도우 바탕화면 속으로 들어왔다. 이쯤 하니 몽골의 자연을 예찬하는 문장을 쓰는 것도 지겨울 정도지만, 매일 감탄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곳이다. 몽골은 매일 널따란 도화지를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듯했다. 착 첫날 울란바토르는 노란빛, 어제의 차강 소브라가는 붉은빛이었다면, 지금은 온 세상이 푸르다. 


 욜링암 들판 쪽으로 걷다 보니 잠깐 비가 그친다. 햇빛을 받은 들판이 더 선명한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이 시시각각 느껴진다. 눈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맑은 공기도 거슬림 없이 그대로 느껴진다. 광활한 평원, 그 자체다.


눈앞에 야크가 걸어 다닌다. 200% 실화다.

 웬 괴상한 동물 소리가 저 멀리서 난다. 이럴 수가, 눈앞에 야크가 지나다닌다. 나도 모르게 억! 소리가 입 밖으로 났다. 이목구비가 동시에 놀라고 있다. 최근에 이렇게 무언가에 감정이 동요된 적이 있었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로 글을 쓰며 즐거움을 느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글로 쓸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무던해진 것이겠고 아쉽다면 섬세함이 떨어진 거고. 예전에는 하나하나 희로애락을 느꼈던 작은 에피소드들이 반복되기 시작한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이제는 일을 하면서 화가 난다거나 답답하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대로 기쁘거나 설레는 일도 줄어 버렸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정말 거짓 없는 진실로다가  요즘 내 작은 소원들 중 하나가 '영화 보다가 딴지 안 걸고, 스마트폰도 안 쳐다보고 주인공의 인생에 몰입해서  엉엉 오열하기'다. 배우가 울면 나도 같이 눈물이 나던 순간이 있었는데. 처음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프라하의 밤 야경을 보고 감격해서 눈물이 난 적도 진짜로 있었는데. 


 "영혼이 없는데?" 요즘 내가 지인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어느 순간 리액션에 영혼이 없다나~ 15초로 바뀌어대는 쇼츠와 릴스에 뇌가 적응을 해서인 것 같기도, 기계적인 주 5일 출근에 자동 절전모드를 구동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니다. 옛날에 비해 요동치지 않고 잔잔한 마음 덕분에 편할 때도 많으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이렇게 이목구비에 오장육부까지 간질간질하게 놀라는 기분은 꽤 좋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카메라를 들어 기계적으로 셔터를 누르다, 어느 순간 포기하고 그냥 걸었다. 눈으로 담아 어떻게든 기억해 내야겠다.



 잠시 비가 그치긴 했다만, 땅이 질척거려 승마는 결국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위험할 수도 있고, 뒷 일정 중  '어르헝 폭포'의 들판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그곳에서 말을 타기로 결정지었다. 대신 우리는 말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는데 하나 난감한 것이 있었다. 말들은 사람을 태운 채로, 걸으면서... 똥을 쌌다.  


 말들이 똥 싸는 것을 그렇게 많이 보기는 또 처음이다. 등에는 사람을 한 명씩 태우고, 네 발로 뚜벅뚜벅 걸으며, 길에서 똥을 싸다니...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웃기고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웃기만 하기에는, 신고 있던 운동화가 조금 위험했다. 우리가 걸어갈 트래킹 코스에 뜨끈한 말똥이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똥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어, 시선은 자연스레 바닥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도 잘 살펴야 하고, 푸른 초원을 잠깐이라도 놓치기 싫으니 앞도 봐야 하고 고개가 위아래로 계속 끄덕거린다. 말을 아무래도 탔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아쉬웠지만 시내가 한 결정이라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른 초원에서 욜링암의 깊은 절벽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비도 더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말들도 걸어 들어갈 수 없는 경사진 계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예! 드디어 말똥도 이제 안녕이구나! 그 와중에 행복하다. 사람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초록색이었던 세상은 점점 가파르게 깎여진 암석들의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초록빛은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비는 점점 거세졌고, 계곡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은 바위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협곡은 점점 높아졌고 또 깊어졌다.


 걷는 와중 욜링암의 돌들을 직접 조각해서 팔고 계시는 상인을 보았다. 작은 돌을 낙타를 비롯한 여러 모양으로 깎고 계셨다. 신기해서 슬쩍 눈길을 주다,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얼른 게르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다. 아저씨는 우리가 물건을 사든 말든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매일을 이런 절경과 함께하는 일상은 어떤 기분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빗 속에서 약간은 건조해 보이던 아저씨의 눈빛이 무던한 것 같기도 지친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깎아지른 욜링암을 바로 앞에 두고, 물에 젖어 은근히 미끄러운 돌길에 행여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감각에 훨씬 더 집중하게 된다. 저 푸른 들판보다 게르로 돌아가는 길에 밟을지도 모르는 말들의 뜨끈한 흔적이 더 걱정된다. 아무래도 슬슬 몽골의 자연에 적응을 하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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