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쿡의 항해 일지나 난중일기까진 아니더라도 나의 백수 일지가 조금은 거창했으면 했는데.. 거참 큰일이다. 몇 백 년 후에 이 일기를 외계인이 발견해 나의 미천한 백수 라이프를 인간 군상의 대표로 여기면 어떡하지. "2022년의 인간은 이렇게 살았군. 역시 하찮은 인간 같으니라고!" 하며 몇 안 남은 인간을 죽여 지구를 정복하러 오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쓰잘데기 없는 상상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쓸 게 없다. 오늘 한 것들이라도 적어볼까.
* 5월 26일의 일
- 밥 해 먹기 : 두 끼 엄청 열심히 해 먹음..
- 사이클 30분 타기 : 사실은 25분
- 독서 : 10페이지..읽음
- 영화 <와일드> 앞에 잠깐 봄
- 유튜브 보기 : 강동원 목공소(강력 추천. 마음의 평화. 시력에 평안), 나의 해방 일지 추측 영상(주말만 기다리는 중), 그것이 알고 싶다/알쓸범잡/사건반장 각종 범죄심리 영상(욕이 절로 나옴)
혜원, 프로파일러가 되고 싶은 거냐? 유튜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에 핑계를 대자면 두통이 심했다. 어깨에서 시작된 묵직한 통증이 뒤통수까지 타고 올라와 온종일 저릿저릿했다. 거북목이 심해 자주 있는 일인데 요 며칠 생리통으로 약을 과다 복용해서인지 진통제가 들지 않았다.
거북목의 고통에 대해 적어볼까 했는데 백수 일지가 아니라 반려 질병일지가 될 것 같았다. 눈알이 빠질 듯 아파올 것만 같은..
흠. 오늘에서야 유부초밥을 하기에 적절한 쌀의 양을 알아냈으니 그거라도 적어볼까.
늦잠을 잤다. 백예린 직캠 영상을 보느라 늦게 잠에 들어서였다. 덕분에 꿈에서 초록 시폰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휘날리며 바람과 함께 유영하는 나를 만났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자유로워 보였다. 엄청난 음치, 몸치에 누구 앞에 설 대범함이 없는 나이기에 이미 꿈속에서 꿈인 걸 인지했지만 눈을 더 질끈 감고 조금 더 무대를 즐겼다.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하려 들어 올린 휴대폰 화면엔 카톡 알람이 수두룩했다. 새벽에 업로딩해둔 글을 친구들이 읽은 모양이었다. 친구들은 '겨털'에 반응했다. 카톡을 하느라 휴대폰을 쥔 목적은 잊었다. 슬슬 배가 고파와서야 시계를 봤다.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다음 주에 본가에 내려가 있을 예정이라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재료들을 추렸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유부초밥. 그것만 먹기엔 아쉬우니 잔치국수까지 끓이기로 했다. 고명은 계란 뿐이었지만.
유부초밥을 할 때면 쌀통을 들고 한참을 고민한다. 컵의 2/3를 넣을까. 한 컵을 다 넣을까. 저번에 얼마나 넣었더라.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4/5만큼 떠서 솥에 부었다.
밥을 안쳐두고 잔치국수 양념장을 만들었다. "간장에 참기름이랑~ 깨 많이~ 고춧가루도 많이? 다진 마늘도 좀 넣고~ 음~ 뭐가 빠졌을까요? 네~ 파도 쫑쫑 썰어넣어야지요호~~" 일주일에 만나는 사람이라곤 편의점 아줌마, 남자친구 뿐이어서 혼잣말이 많아졌다. 모든 말에 음을 붙이는 건. 원래 그랬다.
휘파람을 불며 재료를 저었다.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을 보니, 흉내를 내긴 했는데 여전히 엄마의 맛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치면 바로 나올 텐데 이럴 땐 구닥다리를 자처한다.
♡˖◛ 엄마! 담주에 내려가면 양념장 소스 비율 좀 알려줘
큰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부어 유부를 봉지째 넣었다. 그릇은 자리가 좁아 냉장고 위로 옮겼다. 우리집 냉장곤 키가 120cm로 아주 작아 때론 선반이 된다.
가스레인지 한쪽 화구엔 다시물을 우리고, 한쪽 화구에선 계란지단을 부쳤다. 노릇하게 구워진 지단을 돌돌 말아 가위로 쫑쫑 잘랐다. 나무도마를 꺼내 칼로 써는 건 자취 초보가 할 법한 일이다.
밥솥엔 아직 5가 떠있었다. 뭘 하면 좋을까. 부엌에선 5분도 아껴 쓰게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원두나 갈아두자! 긴 원통형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뚜껑을 딸깍 닫아 한 손으로 밑 부분을 꽉 쥐고, 한 손으론 뚜껑 위쪽에 손잡이를 끼워 힘껏 돌렸다.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들으며 이건 역시 서양의 건식 맷돌이란 생각을 했다. 습식 맷돌은 믹서기려나. 손에 쇠 냄새가 스며들 때쯤 밥솥이 울었다.
밥 짓기의 완성은 뜸들이기라지만, 10분을 넘게 기다리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30초의 숭고한 의식으로 대신했다. (...) 28, 29, 30! 까만 솥을 통째로 꺼내 밥을 식혔다.
냉장고에 올려뒀던 유부피의 봉지를 뜯어 뜨거운 국물을 버리고 유부가 머금고 있는 물기를 짜냈다.
으 뜨 으 뜨(으 뜨거워)
밥에 건더기 수프와 초밥 소스를 넣고 골고루 비볐다. 난 유부초밥의 이 달콤, 시큼한 냄새를 좋아한다. 밥알이 전혀 식어있지 않았다. 너무 뜨거워서 숟가락으로 밥을 반으로, 또 반으로, 또 반으로 잘 나눠서 유부피에 채워 넣었다. 숟가락이 밥을 안착시키지 못하고 계속 데리고 나왔다. 결국 손을 희생하기로. 손에 밥풀이 들러붙을 때면 찬물에 손을 한 번씩 씻으며 열기도 덩달아 식혔다.
유부초밥을 할 때면 매번 밥이 남았었다. 밥이 많아 늘 싱거웠고 꾸역꾸역 넣다 보니 유부는 늘상 터졌었다. 속으로 들어간 건 그나마 유부의 맛으로 먹으면 되지만, 못 들어간 깨 박히고 어중간하게 시큼한 밥은 골칫덩어리였다. 다행히 오늘은 두 숟가락 정도만 남았다.
* 앞으론 유부초밥은 눈솔언니가 사준 컵으로 쌀 2/3를 잊지 말아야지. 그 컵을 깨뜨려서도 안 돼.
남은 밥을 입에 넣고 소면을 삶기 위해 냄비를 하나 더 꺼냈다. 소금 한 숟가락을 넣은 물을 올려두고 설거지 1차전을 치렀다. 수전 물소리를 뚫고 보글보글 소리가 들렸다. 소면을 빙그르르 돌려 넣었다. 녹초가 된 사람이 온탕에 몸을 맡기듯 소면도 맥을 못 추고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얀 거품이 냄비 옆면을 타고 끓어오르다 중앙으로 부서져 내리길 몇 번. 면발 한 가닥을 끌어올려 잘 익었는지 살폈다.
오케이.
'뜰채를 산다는 걸 또 까먹었구나' 이런 건 꼭 써야 될 때야 다시 알아차린다. 젓가락으로 면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잘 막아가면 뜨거운 물을 부었다. 싱크대가 웅! 웡? 흉내 낼 수 없는 이상한 소릴 냈다. 이러다 하수가 녹아내릴지도 모른다고 몸소 알려주는 그 소리. 그제야 찬물을 틀었다. 요리를 하면 데울 것도 많지만 식힐 것도 참 많구나 생각했다. 면발도 탱글탱글해지도록 찬물에 꼼꼼히 적셨다.
그릇에 면을 호빵처럼 오목하게 잘 앉히고 계란지단을 쌓아 올렸다. 다시물만 부으면 완성인데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달 본가에 갔을 때, 쌓아둔 고명 위로 다시물을 들이부어 모양을 망치던 내게 "가장자리로 살살 부어야지!" 했었다.
살살, 살살을 입으로 웅얼거리며 정성스레 국자를 기울였다. 김가루는 취향껏. 나는 아주 아주 많이 뿌렸다.
p.s. 내일은 꼭 모험을 하러 떠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