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에서 만나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면 큰아빠가 떠오른다.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하시며 늘 고향(김천)에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서울에 올라와 혼자 자취하고 있는 내가 생각이 나실 때면 <와서 반찬 좀 가져가라>, <요새는 어디서 촬영하냐> 전화를 하셨다. 내가 먼저 <몸은 어떠시냐> 전화했던 날, 울컥하셨던 건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시고는 차분히 웃으시던 게 귀에 선하다. <아이고 이제 혜원이가 큰아빠 건강도 물어주네> 하시며 괜찮다고 하셨던 큰아빤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얼마 뒤 하늘나라로 가셨다.
큰아빤 아빠와 유일하게 닮은 형제이자, 전가네 특유의 농담을 아주 잘하셨다. 예를 들자니 딱히 떠오르진 않아 적어둘 걸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시답지 않아 뇌리에 박혀있진 않지만 그래서 더 일상에 잘 스며들었던 우스갯소리들이었다.
고향 동네 중심지엔 큰 식당이 하나 있다. 난 그곳을 지나칠 때면 또 큰아빠를 떠올린다. 정확히 말하면 큰아빠와 나 단 둘이만 아는 비밀을. <아~주~~> 하는 큰아빠의 목소리를.
얼마 전, 그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됐는데 큰아빠와의 우정을 지워버리는 것만 같았다. 큰아빠 저 이제는 괜찮아요, 용서했어요라고 말할 수 없기에. 아직도 불현듯 찾아오는 악몽의 순간들로 울적해지기에. 큰아빠와 함께 했던 등하굣길을 잊지 못하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먹고 있는 내 스스로를 음흉한 인간이라 여겼다.
2009년 여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곧바로 방학을 맞이해 한 달 만에 학교에 돌아갔는데 왕따가 되어있었다. 워낙 마을이 작아서 왕따를 주도하던 친구를 큰아빠도 알고 계셨다. 동네의 큰 식당이 그 애의 외할머니댁이자 그 애가 사는 집이었다. 학교에 가는 길목에 그 식당을 지나치게 되는데 원래라면 우리 집 차를 얻어 탔을 그 아인, 코딱지만큼의 양심은 있었는지 왕따를 시키는 동안엔 버스를 타고 다녔다.
큰아빠의 택시를 보곤 쭈뼛거리는 그 아이를 스치며, 많은 어른들이 외면하던 사건을 큰아빠만이 내게 이야기하셨다. <아~주 고~~약한 년이더만?>, <크면 쟨 여기에 발도 못 디딜 거야>, <질투가 나서 그래.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오지. 공부도 잘하지>, <네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게 복수야. 배알이 꼴려서 열불 날 걸> 그 외 심한 말들도 오갔다.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학교에 간 날은 버틸만했다. 고향에 들른 큰아빠의 택시를 타고 등하교했던 그 며칠로 나름의 왕따 대처법을 깨우쳤다. 주문에 가까운 정신승리. 너는 날 단 몇 개월을 괴롭히겠지만, 난 평생 널 증오하리. 네가 괴롭힐수록 난 너보다 더 잘 살아야 할 동기를 얻어 그러니 이 또한 감사히 여기리.
정말로 큰아빠 말씀처럼 그 아인 졸업을 하곤 변변찮은 소식들만 들려오더니 그마저도 끊겼다. 그 아이의 외할머니, 외삼촌 모두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를 삼갔다.
며칠 전, 큰아빠의 첫제사였다. 살아계셨을 때 자주 봤으면 빈자리를 더 크게 느꼈을 건데,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했기에 여전히 도봉구에서 큰소리치며 살고 계실 것만 같다. 손님을 기다리며 택시에 앉아 무료함에 못 이겨 전화를 거실 것만 같다. <큰아빠, 저는 괴롭히는 사람이 생기면 글 쓸거리가 생겼군. 인생아 꼬여라. 내가 풀어갈게 하며 재밌어져요. 큰아빠께서 알려주신 복수 방법은 사필귀정에 대한 믿음이었겠죠.> 전화를 걸고 싶다.
시골에선 유독 죽음이 가까이 있는 느낌이다. 나이 든 어르신들만 남아있는 동네여서 그런 거겠지. 고향에 내려와 있는 열흘간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듣거나, 이야기했다. 백수가 되기 전엔 내려와도 기껏해야 이틀밖에 있지 못해서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백수가 되고 오래 시골에 있으니, 몇 년만에 들리는 마을이 여럿 됐다.
엄마에게 <여기 살던 할머니, 저기 살던 할아버지 잘 지내셔?> 안부를 물을 때면 모든 답은 하나였다.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코로나로 인해 돌아가신 ㅍ마을 할머니, 농기계에 끼여 돌아가신 ㅈ마을 할아버지, 경운기를 몰고 가다 절벽으로 떨어져 돌아가신 ㅅ마을 아저씨 등등 사인은 제각각이었다. 어릴 때 심히 못생겼던 내게 <못난이 왔나!> 하시던 방앗간 할머니마저 떠나셨단 대답을 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를 마주쳐도 팔짱을 끼곤 치! 입 소리를 내거나 고개를 휙 돌리며 인사도 안 했었다. <몇 년 전에 봤을 때 할머니가 "못난이 맞나! 어릴 때 얼굴이 하나도 없네! 진짜 못 알아보겠다”하셨었는데!> 말하고 보니 7-8년 전의 일이었다. 충분히 일이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할머니 잘 지내시나요? 못난이여도 매번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애정 표현이었을 텐데 너무 늦게 알아버렸네요. 우체국 앞을 지날 때면 할머니께서 큰소리로 저를 불러주셔서 동네 슈퍼스타가 된 것 같았어요. 그리워요.)
지난달 어버이날에 건강한 모습으로 ‘장수' 막걸리까지 한 잔 하고 부산으로 돌아가셨다던 형진이 아저씨네 할머닌 한 달만에 세상을 급히 떠나가셨다. 초상을 치른 아저씨네에 들렸는데 강아지 뭉치의 집도 텅텅 비어있었다. 할머니를 인도하러 먼저 떠난걸까. 아저씬 크게 슬퍼 보이진 않으셨다. 이상하게도 큰아빠를 보내는 우리네 가족도 그랬었다. 누구 하나 울기라도 하면 나도 금세 울어버릴 것만 같았는데 다들 죽음에 달관한 도인처럼 담담해서 눈물 한 방울 훔치지 못했었다.
어떤 할머니께서 얼마 전 요양원에 가셨단 이야길 나누며. 노인들이 요양원이나 병원에 실려가는 건 죽음의 길, 첫 단계라며 술자리에서 오가는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다. 5-60대가 받아들이는 이별과 죽음을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떠나가는 응급차를 보며 하염없이 울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을 쉽게 준다. 인간을 다 가엾게 여겨서일까.. 회사를 관두기 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작품에서 강수연 선배님을 한 두 번 뵀다. 선배님의 죽음을 접하곤 친한 분장팀 언니에게 허망한 마음을 토로했었다. <언니, 몇 번 뵌 적도 없는데 기분이 이상해. 털털하고 참 좋으셨는데. 선배님 자세나 제스처 같은 게 자꾸 떠올라. 그냥 스쳐가기만 하는 연은 없나 봐> 언닌 자기에게도 그런 선배님이 있다고, 그래서 어떤 마음인 지 알 것 같다고 했다.
송해 선생님.. 선생님이 실검에 오르거나 기사가 뜰 때면 심장이 떨렸다는 언니. 언니는 분장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송해 선생님과 악단 선생님들을 따라다녔다. 얼마 전 선생님이 돌아가시곤, 언니와 선생님이 나눴던 추억들을 훔쳐보는데 상처 난 곳에 소독약을 바르듯 저렸다.
일요일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이모부,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아빠, 집의 모든 문이 열려 사무실, 안방, 거실 세 곳에 있는 텔레비전의 소리가 한 데 모이던 때. 통신 속도 차이로 <전국~ 전국~~ 전국~!!> 도돌이표처럼 흘러나오던 익숙한 목소리를 이젠 들을 수 없다. 동글동글하시던 얼굴이 많이 야윈 체 마지막 공식 행사를 하신 영상을 보니 낯설고 속이 상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과 어딘가 닮아계셨다.
나보다 어린 이들의 죽음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데. 지난해,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란 동생이 죽었다. 오빠의 카톡을 보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아니, 진짜 왜? 아 너무 어린데..>라는 말만 되뇌었다. 아빤 그 동생의 부모님이 하는 식당에 오빤 데려가도, 나는 그 식당 앞으로 지나치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 딸을 떠올리게 할까 봐 배려하는 어른들의 약속 같았다. 큰아빠의 사진을 찾으려 앨범을 폈다가 내가 그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을 몇 개 발견했다. 어째서 이렇게 빨리 간 걸까.
몇 번을 겪어도 떠나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낙각을 보고도 노루가 타닥타닥 거닐었을 산속 길들을 짓는 내게. 과연 죽음이 익숙해지는 시기가 올까. 시간이 흐를수록 미련은 짙어지고 눈물도 불어나는데 정녕 죽음을 잔잔히 맞이하는 날이 올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 눈에 들어온 책마저 죽음이 궁금한 모양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직은 살아갈 날이 더 많다 여겨서인지 죽음이란 단어 앞에선 나의 죽음보다 누군가의 죽음을 먼저 그린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기에 크나큰 오만일 수도 있지만. 거북이의 비행기란 노래로 장기자랑을 했던 추억 하나로 거북이의 노래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터틀맨 아저씨를 그리워하는 내가. 죽음을 알아가는데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죽음이 누구에겐 휴식이 될 수도 있지만, 삶에 강렬한 애착이 있는 내겐 그저 슬픈 헤어짐일 뿐이다. 인간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해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을 거다. 우리 모두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뜻을 정립해가는 과정에 놓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죽음을 바랄까. 어떻게 살고 싶은걸까와 같은 말이겠지. 도무지 모르겠다. 결론 없는 절절한 글만 끄적일 뿐이다.
소원이 있다면 제발 구름 위 동산이 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할머니, 둘째 고모부, 큰아빠,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앞으로 나보다 먼저 도착해있을 모두를 다시 만나고 싶다. 뒤따라올 나의 연들을 기다리고 싶다. 보고 싶었다고, 우리 모두 사느라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더이상의 이별은 없는 사랑만이 약속된 저승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