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박스 안에 몸을 구긴 고양이처럼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 말할 수 있는 것도 특권에 속하는데, 적잖은 입이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삶은 신자유주의를 산다.
얼마 전 별세한 홍세화의 마지막 칼럼 속 문장이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좌파라 칭하던 사람, 한겨레를 언론 중 가장 좋아한다던 사람, 투쟁과 연대를 좋아한다던 사람, 그리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를 하는 사람. 그런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를 곱게 리버럴이라고 포장해놓지만, 저런 문장을 만나면 포장지가 찢어발겨져 비루한 알몸을 드러내고야 만다. "다 그러고 살잖여, 뭐 나만 그러냐고..." 라는 구차한 변명이 불쑥 목에 올라왔다. 부끄럽다.
진짜로 부끄럽냐고? 진짜 그렇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볼 거야?"라고는 묻지 마세요. 그건 대답 못한다. 당신이 먹는 게 당신이라는 말처럼,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설명한다는 광고처럼, 오늘 보낸 삶이 나를 설명한다. 갑자기 고양이 얘기를 좀 하자면, 나는 고양이를 2마리 키운다. 고양이는 가끔 자신의 몸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박스 따위에 몸을 구겨넣는다. 나는 고양이의 그 행위가 "다 컸는데 지가 어릴 때 몸 크기인 줄 알고 그러는 거야"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진짠지 아닌지는 따지지 말자 모르겠으니까. 아무튼 그 얘길 듣고 사람이나 고양이나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제법 나이가 찬 사람도, 20대의 컨디션인 줄 알고 비슷한 강도의 운동을 하려 하고, 어렸을 때 관심 가졌던 걸 아직도 자신의 관심사라 여긴다. '나'라고 인식하는 나는 정말 최신의 나, 그러니까 '오늘의 나'로 업데이트 되어 있을까. 부끄럽다.
부끄러움이 꽤 차올랐을 때는 좋은 방법이 있다. 나보다 못난 생각을 욕해보자.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가 나아보일 수 있다. 나는 말과 생각은 같지만 그와 다른 행동의 불일치로 인한 괴로움을 갖고 있다. 어릴 때부터 언행일치를 해야한다고 혼나서일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라고 기도문을 외워서일까. 아무튼간에 생각과 말과 행동이 각기 다른 나를 발견할 때 나는 단단하지 못하고 흐물거리는 슬라임이 된 것만 같다. 그런데 이걸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행동에 말과 생각을 맞추는 방법이다. 나는 이게 언행일치의 함정에 빠진 최악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생각과 말을 버린 채, 그저 언행일치를 해야한다는 강령에 굴복해서 그저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쉬운 선택을 하는 것 뿐이다. 물~론!(슈카 톤으로) 삶이 그렇고 행동이 달라지면 말과 생각도 자연스레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내 문화와 행동이 변해도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과 말을 지키고자 하는 걸 그저 위선이라고 치부할 수 있나. 스스로를 그렇게 의심하고 흔들어볼 수는 있어도 변절한 놈이 내뱉을 소리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