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나와 동생과 함께 미술학원에 다녔다. 처음 줄리앙 석고상을 그리던 날, 몇 시간을 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같이 그리기'를 했다. 나는 미술이란 너무나 재미없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학원을 그만뒀다.
그럼에도 사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은 좋아했다. 그림은 내 청소년기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강력한 탈출구였다. 내 교과서와 연습장은 만화와 낙서로 가득했다. 중학교 땐 친구들과 만화부를 조직했다. 고등학교 땐 코스프레하는 친구 옆에서 당시 인기였던 H.O.T 멤버의 캐릭터를 그려 넣은 버튼을 팔았다. 대학 졸업작품으로 굳이 동기들이 안 하는 그림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회사에 들어가면서 가끔 상업적인 목적 외에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 이제 그림과는 영 멀어졌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그만두고 나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림이었다. 그것도 순수 회화,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당장 동생에게 SOS를 보냈다. 동생은 나와 달리 순수 미술을 사랑하고 대학원까지 전공하면서 꾸준히 학원강사를 해 온 베테랑 미술 강사였다. 마침 입시 미술을 그만두고 광화문에서 취미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자마자 부리나케 화실로 달려갔다. 다시 선긋기부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연필과 캔버스의 마찰음이 나를 들뜨게 했다.
몇 개월 만에 개인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마지막에 공들여 그렸던 그림을 화실에 놓고 나왔다. 1년 뒤, 동생 화실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하는데 내 그림도 같이 전시하겠단다. 그런데 거기서 그림이 팔린 것이다.
팔린 그림엔 빨간 스티커를 붙여 둔다
'이야.. 대체 누가 아마추어의 그림을 산다는 거지? 이 참에 화가로 전향해야 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 부모님 댁에서 그 그림을 다시 만났다. 아빠가 모아두신 용돈으로 딸내미의 첫 전시작을 구입하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