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시내버스는 논 사이, 좁은 아스팔트 길을 달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더위를 몰아내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논에는 여물지 못하고 고개를 곧추세운 이삭들이 바람에 한가로이 흔들렸다.
엄마가 다니시던 절의 주지 스님 부탁으로 수박 한 통을 전해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창가에 앉아 여름이 물러가기 시작한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산 능선을 따라 자리한 과수원에는 주먹만 한 부사가 하나둘씩 익어가고 있었다.
버스 안은 시내 오일장을 다녀오는 마을 할머니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했다.
장을 봐온 보따리들이 할머니들의 발치에 하나씩 놓여 있었다.
집집의 고추 농사 근황과 김장 배추 파종은 언제 할 것인지 질문이 오갔고, 마을 소식통인 듯한 할머니 한 분이 막힘없이 술술 대답해 주고 있었다.
"근데, 그 할아버지 상에는 다 갔다 왔나?"
"하필 날이 더워서 선산까지 모시고 가느라 애 먹었다고 하더라고."
아마도 마을에 상을 당한 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할머니들의 대화는 상을 당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다잖아."
"아니 고혈압이었다던데?"
"고혈압이 있었는데 술도 많이 마셨지, 뭐."
그때 버스 뒷좌석에서 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게을러서 그래!"
일순간 할머니들의 시선이 뒷좌석으로 향했고, 고함 소리에 놀란 나도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 창가 자리에 차양이 넓은 농모를 쓴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쳐다보는 할머니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또다시 소리쳤다.
"죽은 것들은 다 게을러서 그래, 살라면 부지런히 숨을 쉬어야지!"
할머니들은 시답잖은 소리 또 시작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또 대낮부터 한 잔 하셨네 그려."
아마도 같은 마을에 사는, 익히 알고 있는 분이었던 모양이다.
"내 말이 틀린가 말이다. 게을러서 숨 쉬는 것도 귀찮으니 죽을 밖에!"
할아버지는 자신을 무시하는 할머니들이 답답하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맞아요. 어르신 말씀이 다 맞지요. 게을러서 숨을 안 쉬니 죽을 수밖에요."
그제야 할아버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감고 졸기 시작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뜬금없는, 억지스러운 일갈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할머니들은 잠든 할아버지가 깰까 봐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 저만치 절이 보였고, 나는 정차 벨을 눌렀다.
차에서 내리기 전, 흘깃 쳐다본 할아버지는 한낮의 깊은 잠에 빠져 미동도 없었다.
마치 그 모습은 원색의 물감을 꾹꾹 눌러가며 그려놓은 고흐의 작품처럼 보였다.
"죽은 것들은 다 게을러서 그래, 살라면 부지런히 숨을 쉬어야지!"
낮술에서 시작된 주정이었는지, 할아버지께서 생각해낸 유머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을리고 주름진 農老의 그 말씀이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모든 게 귀찮아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고 싶을 때, 할 일이 태산인데 안락한 침대를 떠날 수 없을 때.
누군가와의 만남마저 시큰둥해 핑계를 둘러 댈 때.
등 뒤에서 할아버지는 지금도 소리치신다.
"살라면 부지런히 숨을 쉬어야지!"
'네, 네, 그럼요. 살려면 부지런히 숨 쉬어야죠.'
나는 마지못해 빨래를 개키고, 바닥을 쓸고, 장을 보고, 찌개를 끓인다.
살려면 부지런히 숨을 쉬어야 한다.
게을러서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할아버지는 아실까?
할아버지의 빛나는 잠언을 잊지 않고, 오늘도 부지런히 숨을 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