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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라늄이 점점 Oct 21. 2021

아포가토 / 익사하다

영화 '세 가지 색, 블루'

여자는 카페에 들어서자 '늘 마시던 것'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는다.

아이스크림과 커피 한 잔.

웨이터가 놓고 간 아이스크림 위에 뜨거운 커피를 붓는 여자.

여자는 티스푼을 들어 커피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떠먹는다.

무엇 때문일까?

굳이 아이스크림에 뜨거운 커피를 부어 떠먹는 저 이율배반은.

하지만 그 한 잔의 아이스크림 아포가토는 이 영화의 모든 이율배반을 설명하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자유'라는 거대한 이름이 덮어버리고, 결국에는 그것이 '삶'이라고 설득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교통사고가 났다.

반파되어버린 차 안에서 남편과 아이가 동시에 유명을 달리했다. 

혼자 남은 여자, 줄리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려 한다.

하지만 죽음이 유죄가 아니 듯, 생존 역시 유죄가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가야 한다.

세기의 작곡가였던 줄리의 남편은 생전 유럽 통합을 기념하는 대작을 의뢰받아 작곡 중이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세간에는 그 작품이 남편이 아닌 줄리가 쓴 작품이었다는 소문이 떠돈다.

줄리는 그 모든 가십에서 벗어나려는 듯,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전의 자신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그림자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한 줄리.

그러던 중, 줄리를 사랑해왔던 남편의 친구, 올리비에 - 물론 친구의 부인이었으니 그동안 그 감정을 드러내지는 못했겠지만 - 가 작곡의 마무리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줄리는 혼란스럽다.

오랫동안 남편의 그늘에 가려졌던 줄리의 역량을 알고 있었던 올리비에는 함께 곡을 마무리하자고 독려한다.

어쩌면 줄리는 그동안 자신의 재능을 남편에게 의탁한 채 단란한 가족을 완성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줄리는 올리비에와 함께 곡을 마무리하기 한다.

예기치 못했던 교통사고와 가족의 죽음, 방황, 그리고 치유.

재능이 있는 한 여자가 가족의 죽음 이후 그 슬픔을 치유하고 자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찌 보면 뻔한 - 영화가 1994년, 지금부터 거의 30년 전 개봉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

스토리다.


하지만 뻔한 스토리의 영화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걸까?

이 영화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꽉 쥔 주먹으로 돌담을 쓸며 걸어가던 줄리.

주먹 쥔 손등에 도드라진 뼈가 돌담에 긁혀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맺힌다.

어설픈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자학이다. 

순간, 그녀의 아픔이 통째로 내게 들어와 심장에 화인처럼 아프게 새겨졌다.

그 사고가 없었다면 줄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사랑스러운 딸과 명망 높은 남편. 그리고 혹시 알게 되었을지라도 모른 척 덮어두었을 남편의 외도.

그래도 그녀의 삶은 평안했을 것이며, 가정은 행복했을 것이다.


다시 아포가토 이야기로 돌아간다.

'익사하다'는 뜻의 아포가토.

아이스크림을 에스프레소에 녹여 먹는 아포가토는 커피에 녹는 아이스크림이 익사하는 것처럼 보여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영화에는 파란 조명이 가득 한 수영장, 파란 수면 아래에서 수 없이 자맥질하는 줄리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파란 자유 속에 익사하듯 자맥질하는 줄리.

(이 영화의 원제는 '세 가지 색 : 블루'다. 프랑스 국기에 사용되는 색 블루, 레드, 화이트의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블루는 '자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수영장의 물이 자궁 속의 양수를 상징하며, 그 속에서 수영하는 것은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스스로의 숨을 끊으려는 듯, 수영장을 가득 채우는 미완의 노래에서 도망치려는 듯해 보여 안쓰러웠다.

언제쯤 그녀는 강요당하는 그 자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차갑고 자비 없는 그 파란 자유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까?


30여 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몰랐던 그 막막한 답을 이번엔 찾았다.

벤치에 앉은 줄리의 얼굴에 눈이 부시도록 밝은 햇빛이 비친다.

수영장을 가득 채운 파란빛이 아니다.

죽은 딸의 방에서 떼어온 샹들리에의 새파란 유리 조각에서 되비치던 칼날 같던 파란빛이 아니다.

얼굴을 집어삼킬 듯 환한 햇살 아래의 줄리.

그 앞으로 허리가 굽은 한 노파가 유리병이 담긴 가방을 들고 또각또각 걸어간다.

쓰러질 듯, 천천히 쓰레기통 앞에 도착한 노파.

굽은 허리를 힘겹게 편 노파는 가방에서 꺼낸 병을 쓰레기통에 넣으려 안간힘을 쓴다.

결국 병을 쓰레기통 입구에 꾹꾹 눌러 넣은 노파는 가던 길을 또각또각 걸어간다.

환희처럼 밝은 햇살은 줄리의 얼굴 위에서 절정이다.

그 장면을 본 순간, 아! 하고 깨달았다. 

버릴 것은 종내 버려져야 한다는 걸.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간 줄리는 독백하듯 말한다.

"꼭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남았어요. 버리는 거요. 추억도 소중한 것도 이젠 원하지 않아요. 친구도 사랑도 모든 게 덫일 뿐이에요."


영화의 엔딩.

창 가에 선 줄리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녀는 울고 있다. 

안타깝게 유리병을 버리려 안간힘을 쓰던 노파처럼, 쓰레기통에 쳐 박힌 유리병처럼.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자유를 얻기 위해 이전의 것들을 떠나보내기로 한 모양이다.

눈물은 그것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아닐까?

아니면 한 손에 쥔 것을 내어주어야만 다른 한 손을 채워주는 잔혹한 삶에 대한 서글픔이었을까?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밝아오는 새벽의 파란 여명으로 조금씩 물든다.


나는 문득 그 시가 떠올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줄리, 혹은 나를 위로하고 싶은 밤이다.

모든 인생은 여지없이 무엇인가 하나를 버려야 하나를 얻을 수 있는 지독한 패러독스의 연속이니, 

아무리 뛰고, 나는 자라도 그 패러독스의 융단이 깔린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있으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그래도 삶은 너그러워서 빈자리를 무엇으로든 채워주기 마련이라고.

꽁꽁 얼린 아이스크림을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녹인 후에야 맛있는 아포가토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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