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 병원에 가는 이유
일년에 한 번씩 만나는 소화기 내과 담당교수는 췌장과 담도, 간 전문이다.
벌써 5년 째다.
담당 교수의 모니터에 뜬 내 차트엔 우리 엄마의 이름이 적혀 있다.
김**(췌장암)의 따님.
그는 7년 전, 우리 엄마에게 췌장암 4기, 간으로의 전이를 선고한 사람이다.
동네 병원에서 "췌장이 조금 부었네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큰 병원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갑자기 허리가 굽을 정도로 살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큰 병원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늘 그런 후회를 한다.
어쩌면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 세 자매는 똑같은 후회를 할 것이다.
7년 전, 엄마는 지방의 제법 큰 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 보라'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지방 병원에서 받아온 CT CD를 확인한 영상의학과 교수는 CT를 다시 찍자고 했고, 그 외 생각도 나지 않는 낯설고 어려운 이름의 검사들이 줄줄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야 결과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진찰실 앞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엄마는 당신의 이름이 불려지자, 내 등을 떠밀었다.
"니가 가서 듣고 와. 난 싫어."
나는 별일 아닐 텐데, 별스럽게 왜 그러냐고 엄마 손을 잡아끌었지만, 엄마는 완강하게 버티셨다.
아, 그때 나는 눈치챘어야 했다. 엄마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교수는 컴퓨터 화면에 뜬 CT 영상을 볼펜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먹지 위에 뿌려진 하얀 점처럼 보이는 부분에 동그라미를 겹쳐 그렸다.
"간까지 전이가 되셨어요. 췌장암 4기입니다."
10월 첫째주, 병원 정원의 커다란 활엽수들이 눈치도 없이 낙엽을 떨구고 있었고, 나는 그 나무 아래서 소리내어 울고 또 울었다.
엄마는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간호사로 근무하는 동생네 집 근처 암센터를 다니기를 원하셨다. 나는 대학병원이 가까운 우리 집에 머물기를 바랬지만,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암센터의 치료 때문이 아니라, 고통스러울 때 진통제를 놔 줄 동생이 옆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암센터의 치료로 호전될 수도 있으리라는 우리의 기대는 하루하루 남루한 꿈으로 전락했다.
동생 중 누군가가 "이제 준비를 해야할 지도 몰라."라고 말했을 때, 동의하지 않았지만, 왜냐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는 나 혼잣말로 끝났다.
다만, 내일 가겠다는 내 대답에 엄마는 몽롱한 목소리로 "그래 빨리 와."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계속된 엄마의 혼잣말이 끊지 않는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언제 봄이 오나, 아직도 춥지?..."
다음 날, 새벽 5시. 지난 밤에 엄마가 떠나셨다는 제부의 전화를 받았다. 부고를 알리는 제부의 목소리에 동생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컴컴한 거실 구석에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일년 후.
나는 호전되지 않는 소화불량 때문에 동네 병원에서 의뢰서를 받아들고 그 대학병원을 다시 찾았다.
담당 교수의 처방으로 CT 촬영을 하고 다시 병원에 갔을 때, 담당 교수가 바뀌어 있었다.
진료실이 이층으로 옮겨가 있었지만, 진찰실 앞에 붙은 명패를 보는 순간, 나는 멍해졌다.
그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교수 앞 의자에 앉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덤덤하게 말했다.
"교수님은 절 모르시지만, 저는 교수님을 알아요. 2년 전에 저희 엄마께 췌장암 진단을 내리셨어요."
놀란 교수는 엄마의 이름을 물었고, 이내 2년 전, 엄마의 진료차트가 그의 모니터에 떠올랐다.
모니터에 뜬 엄마의 이름을 본 순간, 나는 주책맞게 눈물이 고여 난감했다.
"엄만 괜찮아."
울고 있는 나를 다독이던 엄마의 손이 떠올라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내 담낭에는 3개의 혹이 있다고 했다. 크기가 작아 위협적이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지켜봐야한다고도 했다.
교수는 엄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책임감 때문인지, 아주 작은 것까지 놓치지 않으려 꼼꼼하게 묻고 검사 결과를 브리핑해 준다.
그가 1년 동안 미국 연수를 갔을 때, 잠시 나를 담당해 준 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까지 검사할 정도는 아니신데..."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요. 이렇게 까지 꼼꼼하게 검사받는 건, 김여사님이 제게 준 선물이죠.'
나는 엄마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병원을 갈 때마다, 엄마가 앉아 있던 진료실 앞 의자를 볼 때마다, 엄마가 차를 타고 떠나던 주차장을 지날 때마다, 계절이 아닌데도 자꾸만 낙엽이 떨어진다.
분분히 떨어지는 낙엽 위로, "엄만 괜찮아."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자꾸만 쌓인다.
가을이 아닌데, 낙엽이 자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