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연꽃공원엘 다녀왔다.
일요일이어서 공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공용 주차장이 따로 없어, 왕복 2차선 도로는 불법 주차된 차들이 이미 양쪽 일차선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불법 주차된 차 사이에 차를 세우고 공원으로 들어섰다.
8월의 연밭은 만개한 꽃잎과 영글어가는 연밥들로 풍성하다.
활짝 만개한 백련 꽃잎 안에는 씨알이 꽉 찬 연밥이 익어가고 있었다.
여름과 가을이 성긴 레이스처럼 교차하는 8월.
보라색 수련이 핀 연못을 지날 때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오후에 소나기 예보가 있었으니 큰 비를 만나지 않으려면 돌아가야 했다.
주차된 차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반대편 차선에 주정차 위반 단속 차량이 스윽하고 지나간다.
조스의 으스스한 BGM과 함께 유령처럼 지나가는 단속 차량. 누군가 불법주차 신고를 한 모양이다.
잠들었던 키클로페스가 외눈을 부릅뜨고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 볼 것도 없이 달려야 한다. 맞은편 차량 단속이 끝나면 길 끝에서 유턴을 해 이쪽 차례일 테니까..
도로는 낙인 찍히지 않으려는 자들로 북새통이다.
무자비한 그는 과태료 고지서 - 예쁘게 찍힌 번호판이 인쇄된 - 를 우편함 깊숙히 단검처럼 꽂아 줄 것이다.
슬리퍼가 벗겨져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간발의 차로 주정차 금지 구역을 떠났다.
미안하게도 정의는 졌고, 키클로베스는 실패했다.
차가 공원을 빠져나오자 소나기가 시야를 가리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멀리, 주차 위반 단속차량이 입맛을 다시며 빗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한때 운전자들에게 가장 환영받지 못한 직업 중에 하나가 주차 단속 요원이었다.
마주치면 어김없이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 진짜 금방 세웠다니까요.
금방 세워도 불법은 불법. 고지서는 그대의 것이다.
주정차금지 구역에 난입해 휘젓고 다닌 초보 운전사가 있었다. 이름은, 다림.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직업은 주차단속 요원이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해 립스틱보다는 귀여운 머리띠가 어울리는 맹랑한 아가씨다.
그녀가 들어서지 말았어야 할 주차금지 구역은 바로 정원의 운동장이었다.
문밖에서 본 운동장은 햇살이 밝고, 소박하지만 아늑하고 따뜻해보였다.
잘 손질된 꽃밭과 평평하고 고운 모래사장, 그리고 큰 그늘을 만들어내는 아름드리 나무까지...
그 안에서는 넘어지고 뒹굴어도,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저씬 왜 나만 보면 웃어요?"
그때 이미 그녀는 점찍었을 것이다. 내가 머물 곳은 이 아늑한 공간이라고...
너무도 착한 남자, 정원.
그는 운동장에 초대된 사람들의 행복한 한 때를 기록하는 사진사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결국 그에게 운동장은 왁자하던 사람들이 떠난, 텅 빈, 쓸쓸한 공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알지만, 그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며,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자를 잡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의 운동장은 이제 곧 문을 닫아야 한다.
그는 알았을 것이다. 사전 통보도 없이 폐장을 알려온 운명은, 조금의 자비도 없다는 것을.
약봉투를 들고 집에 온 날, 마루에 걸터 앉아 무심히 발톱을 깎다가 바닥에 드러누워 소리없이 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하소연의 고작이다.
그렇게 순하고, 착한 정원이 친구와 마신 술기운을 빌어 "왜 내가 조용히 해야 돼? 왜 내가!"라고 울부짖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고 울컥했다.
왜 진작, 그렇게 큰 소리내어 성토하지 않았나.
왜 진작, 하늘을 향해 왜 나냐고, 왜 이토록 빨리인거냐고 헛주먹을 날리지 않았나.
왜 진작,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발을 구르지 않았나.
한편,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다림은 정원의 운동장을 마구 휘젓고 다닌다.
운동장엔 다림의 급발진 스퀴드 마크와 두서없이 들이받은 충돌 사고의 흔적이 조금씩 쌓인다.
어쩐 일인지 정원은 맹랑한 그녀가 싫지 않다.
그래서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놀러오라고 했지만, '시간이 있어야 말이죠...' 라며 은근하고, 새침하게 신청해 온 데이트를 무심한 척 받아주었을 것이다.
왜 마지막에서야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을까?
다림이 건네 준 아이스크림과 이온 음료를 양손에 들고 번갈아 먹는 정원.
아이스크림처럼 달큰한 다림의 마음이 이온 음료를 타고 정원의 몸에 퍼진다.
그토록 기다려온 이 진한 감정이 왜 지금에야 정원의 양손 가득 쥐어진 것일까?
아무리 힘을 내어 달려도 다림을 따라잡을 수 없던 운동장의 트랙.
기다리지 않고, 잡힐 듯 달아나는 다림을 뒤쫓으며 정원은 생각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이제서야... 왜 지금에...
정해진 폐장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햇살 가득했던, 따뜻하고 아늑했던 운동장엔 그칠 줄 모르는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한기에 꽃들은 사그라들고, 모래는 질척이며, 아름드리 나무는 미친 듯 흔들린다.
이어 퇴장을 알리는 냉정한 안내방송와 함께, 운동장의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손을 잡고 롤러코스터를 타던 시간이, 함께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걷던 시간이, 오토바이에 올라 그의 허리춤을 안고 달리던 그 시간들이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이토록 남의 감정을 갖고 놀 만큼 당신은 불친절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단 말인가!
분노에 찬 다림은 돌멩이를 집어 운동장 안으로 내던진다.
와장창 부서지는 유리, 다림은 입술을 앙다물고 깨진 유리창을 노려본다.
조각조각 깨진 것은 유리가 아니라 다림의 사랑이었다.
어느 새 운동장은 닫히고 그 문엔 열쇠가 채워진다.
그녀가 남긴 형형색색 아름다운 발자국, 웃음 소리, 스냅사진처럼 곳곳에 찍힌 그녀의 미소...
그녀가 남긴 모든 흔적을 덮으려는 듯 운동장 위로 소복히 그리고 조용히, 눈이 쌓인다.
쌓인 눈을 밟으며 다시 찾아온 다림.
머리띠가 어울리던 앳띠고 풋풋하던 소녀는 이제 검은 코트와 화장이 자연스러운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그녀는 사진관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보며 빙긋 웃는다.
그녀도 알 것이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그 감정은 싱그럽지만 떨떠름한, 영글지 못한 풋사과같았다는 걸.
그 여름, 소란하고 부산했던 한때는 이제 유리창 너머에서 빛 바래져가는 사진처럼, 사진첩 한 쪽에 자리한 오랜 사진같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눈부시던 시간이 떠난 자에게는 추억이 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진관을 돌아서 떠나는 다림의 모습 위로 텅 빈 운동장처럼 쓸쓸한 정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다림은 천천히 추억에서 걸어나와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다시 굳게 문이 닫힌 그의 운동장 앞에 서 있다.
월담을 해서라도 들어가 보고 싶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운동장에 남은 그녀의 발자국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다.
일년을 기다려 혹시나 내년 8월, 다시 오늘처럼 소나기를 만나면 그를 떠올릴 것이다.
그때 다시 그의 운동장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한없이 따뜻한 정원의 운동장에 앉아 잠시나마 은혜로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혹시 지금 이 시간, 당신 곁에도 다림이 있다면 경고해 줄 것을 권한다.
"마음 빼세요. 주차 금지 구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