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케인> 분석 1편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시민 케인>. 여러분은 이 평가에 동의하시나요?
제가 이 작품을 처음 본 건 대략 20년입니다. 그때는 이 평가에 통감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AFI에서는 여전히 가장 위대한 미국 영화 1위로 꼽히고 있고, Sight&Sound에서는 무려 50년 간 1위 자리를 수성했습니다.
이처럼 <시민 케인>의 가장 유명한 명함은 ‘1등 영화’일 텐데요. 작품을 보고 이 평가에 수긍하기 어려웠던 분들은 <시민 케인>이 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궁금하기도 하셨을 겁니다.
<시민 케인>이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오늘은 <시민 케인>이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꼽히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화의 역사를 크게 나누면 고전영화(Classical Cinema)와 현대영화(Modern Cinema)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옛날 영화, 요즘 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Modern Art를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술적 패러다임에 따른 분류입니다.
현대영화는 영화 비평의 활성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 누벨바그입니다.
누벨바그의 감독들인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의 사람들이 영화 감독이기 이전에 평론가였지요.
그리고 이들의 우두머리 격 되는 사람이 앙드레 바쟁입니다. 앙드레 바쟁은 그 유명한 프랑스의 영화 저널 「카이에 뒤 시네마」의 창간자 중 한 명입니다. 앞서 언급한 누벨바그의 감독들이 이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하며 평론 활동을 했습니다.
영화 비평의 기원은 1920년대에 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영화 비평의 뿌리는 앙드레 바쟁이 활동하던 4・50년대에 있습니다. 그래서 앙드레 바쟁은 영화 비평의 아버지처럼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앙드레 바쟁이 <시민 케인>에 열렬한 지지와 극찬을 보냈고, 훗날 누벨바그의 감독들이 되는 앙드레 바쟁의 후배들 역시 그의 평가에 동의했습니다.
왜냐하면 <시민 케인>이 현대영화의 특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민 케인>에서 현대영화의 특질로 거론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흔히 deep focus라는 촬영 기법과 함께 언급되는 심도 있는 장면 구성과 시퀀스 쇼트(sequence shot), 두 번째는 서사에서의 파편적 액자 구성입니다.
현대영화는 고전영화로부터의 탈피, 즉 고전영화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시민 케인>의 이 두 요소는 고전영화의 규범을 이탈하는 시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고전영화의 규범은 서사와 편집에 적용되는 일종의 문법 체계라 할 수 있는데, 앙드레 바쟁 같은 비평가들에게 파편적 액자 구성은 고전영화의 서사 규범을, 심도있는 장면 구성 또는 시퀀스 쇼트는 고전영화의 편집 규범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시도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관해서는 다음 편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민 케인>은 앙드레 바쟁을 필두로한 누벨 바그 세대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졌고 영화 비평의 원류 세대할 이들에게 가장 빛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민 케인>의 위상이 이처럼 높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민 케인>은 오손 웰스의 데뷔작입니다.
<시민 케인>이 제작될 당시 할리우드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형 스튜디오였던 RKO가 사실상 영화제작 경험이 전무한 20대 중반의 풋내기에게-각본, 연출, 편집권 등을 일임-이 정도의 전권을 내주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시민 케인>은 제작 전부터 꽤나 주목을 받았습니다.
오손 웰스가 이 정도의 권한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웰스가 제작한 라디오 방송이 어마어마한 화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인데요.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우주 전쟁』을 각색한 라디오 방송에서 오손 웰스는 방송이 되고 있는 지금 외계인의 침공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연출했고 그것이 미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오손 웰스는 바로 다음날 공개 사과를 해야했지만 덕분에 아주아주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던 때가 1938년 10월이었는데요. 이 사건을 계기로 웰스는 이듬해인 1939년 8월에 RKO 스튜디오와 계약하게 됩니다. <시민 케인> 촬영이 시작된 건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40년 7월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기간, RKO와 계약하고 <시민 케인> 제작이 착수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존 포드의 <역마차>를 40번 이상 보면서 영화에 대한 기본기를 익혔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지요.
제작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요.
비밀스러운 제작과정 탓인지 시나리오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루엘라 파슨스(Louella Parsons)라는 영화 칼럼니스트가 <시민 케인>이 언론계의 거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를 다루는 “위장된 전기이며” “그에 대한 악의 섞인 공격”이라며 고발합니다. 이에 허스트는 RKO 스튜디오에 자신의 변호사들과 파슨스가 편집본을 검열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들은 검열 후 <시민 케인>이 허스트를 모델로 삼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며 허스트는 결국 자신이 소유한 “전국 30여개의 신문사에 광고와 리뷰를 비롯해 <시민 케인>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싣지 말 것을 지시”하며 개봉을 저지하려 합니다. 얼마간 공방이 오갔지만 <시민 케인>은 당초 예정일보다 두어 달 미뤄진 1941년 5월 1일에 개봉하게 됩니다.
하지만 개봉 전의 우여곡절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개봉 직후 언론은 찬사를 보낸 반면 대중들은 <시민 케인>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제작사인 RKO에 약 15만 달러의 손해를 주었는데, 당시 대중들에게는 ‘어려운 영화’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194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9개의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각본상만을 수상했습니다. “시상식장에서 그 영화의 이름[시민 케인]이 불릴 때마다 찬사의 탄성을 뒤덮어 버리는 야유와 조롱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즉 <시민 케인>은 지금까지도 늘 논란이 되고 있는 ‘비평과 대중 간의 엇갈리는 평가’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자 거의 첫 사례나 다름 없는 작품인 셈입니다.
이후 <시민 케인>의 가치에 대한 비평적 정당화가 꾸준히 이루어졌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이 영화에 관한 신화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시민 케인>의 위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두 번째 사실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시민 케인>이 공개될 무렵 언론계의 거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작품의 개봉을 막고 사장을 시도했습니다. 허스트가 이 영화를 자신을 풍자한 작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당시 대중들의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시민 케인>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작품인가 하는 비평적 논의에서 있어서는 큰 축을 차지합니다.
<시민 케인>은 허스트에 대한 이야기인가? 로즈버드(rosebud)에 관한 이야기인가?
로즈버드는 케인이 어린 시절 타던 썰매를 가리킵니다. 이 영화는 케인이 로즈버드를 말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로즈버드의 정체를 찾다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나지요.
케인이 허스트를 참조한 것이 일정 부분 사실일지라도, 케인과 허스트를 동일 인물로 보는 시각은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끝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웰즈가 그렇게 발언하기도 했던 것처럼 <시민 케인>은 로즈버드를 둘러싼 인물 탐구 쪽으로 인정되는 편입니다.
그러나 허스트를 다룬 작품이라는 시각에서도 <시민 케인>에 관한 유의미한 비평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시민 케인>은 허스트에 대한 이야기인가? 로즈버드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는 이 두 시각이 충돌하고 교차되는 가운데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영화 비평 및 이론이 성장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담론이 영화의 ‘작가’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작가’ 담론은 영화는 누구의 작품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시나리오 작가(writer)의 작품인가? 작가(auther)로서의 감독의 작품인가?에 관한 논의인데요.
1971년 폴린 케일(Pauline Kael)이라는 영화 평론가가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에 관한 공로는 순전히 공동 시나리오 작가인 허먼 맨키비츠에게 있다는 문제제기를 하는데, 이는 <시민 케인>이 누구의 작품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작가’ 담론을 환기시킵니다.
즉 <시민 케인>은 ‘영화의 작가는 누구인가’ 하는 작가 담론의 논의에서도 논쟁적으로 호출된 작품인 셈입니다
이처럼 <시민 케인>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이었고, 마침 그 시기가 영화 비평이 한참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영화 비평이 한참 성장하던 시기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는 작품이자 비평적 논의에 있어서 늘 중심에 있던 작품이 <시민 케인>이었던 것이지요.
<시민 케인>이 역대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놓여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민 케인>에서 현대영화의 특질로 꼽히는 요소들이 고전영화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