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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코치 May 25. 2022

미국의 언론 재벌이 외톨이로 생을 마감한 이유

시민 케인 분석 4편

2018년에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행복한 라짜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지난해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한 봉준호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빅 팬’이라고 밝힌 알리체 로르바처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지요. 작품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행복한 라짜로>의 시나리오는 꽤나 파격적인 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파격성이 각본상을 수상하는데 가산점이 되었겠지요.


<행복한 라짜로>(2018, 알리체 로르바처)


<시민 케인>은 제14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입니다. 당시의 <시민 케인>은 2018년의 <행복한 라짜로>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복한 라짜로>와 같은 후대의 파격적인 작품들의 선조가 되었지요. <시민 케인>이 필름 누아르의 선조 격 작품이라고도 말씀드렸는데요. <시민 케인>의 플롯 구조는 퍼즐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이 퍼즐 형태의 플롯은, 그저 이야기를 조각내고 구조를 뒤틀어 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민 케인>이라는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커다란 테마로서 구성된 것입니다.


저는 <시민 케인>이 ‘역대 최고의 영화’라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 선호하는 작품도 아니고요. 하지만 이 영화가 여전히 젊고 참신하다는 점만큼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 눈으로 보기에도 낡은 작품이 아니지요.


오늘은 <시민 케인>의 플롯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집필하시거나 연출하시는 분들에게는 유용한 표본이 될 것이며 저처럼 <시민 케인>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신 분들에게도 이 작품의 탁월함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시민 케인> 같은 고전 작품들은 당장 수긍이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왜 훌륭하다고 말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만 짚고 가겠습니다. 종종 <시민 케인>의 이야기를 케인이 자신만의 이상적 시민상을 추구하는 이야기라는 코멘트를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요. 앞으로는 무시하십시오. 케인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 간 사람입니다. 케인이 지내는 성인 재나두가 원나라 황제가 다스리던 곳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1 <시민 케인> 플롯의 구조와 내용


먼저 여러분들이 <시민 케인>의 플롯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조와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앞서 <시민 케인>의 서사는 순환적 이중 시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쉽게 말해서 현재의 시점과 과거의 시점을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즉 <시민 케인>의 플롯은 두 개의 시점으로 펼쳐집니다. 이때 현재의 시점에서는 뉴스팀의 취재원 톰슨이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케인의 지인들을 만나고, 과거의 시점에서는 지인들의 회상을 통해 케인의 생애가 그려집니다.


케인의 사망과 톰슨의 추적이 있는 현재의 시점에는 재나두, 영사실, 대처 기념관, 엘 란초, 번스틴의 사무실, 헌팅턴 기념 병원, 이렇게 총 여섯 개의 장소가 있습니다. 케인이 살던 성인 재나두, 행진하는 뉴스가 상영되는 영사실, 수잔이 공연하는 엘 란초라는 이름의 클럽, 번스틴의 사무실, 릴랜드가 요양하고 있는 헌팅턴 기념 병원, 이렇게 여섯 개입니다. 그리고 이 여섯 개의 장소에서는 각각 한 번씩의 회상이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 여섯 개의 장소를 기억해두면 <시민 케인>의 플롯을 파악하기가 수월하겠지요? <시민 케인> 편의 참고 문헌 중 한 권인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틴 톰슨의 『영화 예술』 제3장 끄트머리에 <시민 케인>의 플롯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요. 플롯이 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단위가 바로 이 여섯 개의 장소입니다.


보드웰과 톰슨의 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민 케인>의 플롯은 총 여덟 개의 분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섯 개의 장소 중 재나두와 엘 란초가 초반에 한 번, 후반에 한 번, 이렇게 두 번 나옵니다. 그래서 여덟 개의 분절입니다. 재나두에서 시작해서 재나두에서 끝나는 수미쌍관 또는 원환 구조라 하겠습니다. 그럼 『영화 예술』에 제시된 표를 따라서 이 여덟 개의 분절과 각각의 내용을 확인해보겠습니다.


1 재나두

케인이 로즈버드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한다.


2 영사실

행진하는 뉴스(News on the March) 내부 시사 후 뉴스팀은 ‘로즈버드’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3 엘 란초

톰슨은 수잔을 찾아가지만 비감에 잠긴 듯한 수잔은 톰슨을 쏘아붙이며 그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4 대처 기념관

톰슨이 대처 기념관에서 대처의 일기를 읽는다.


5 번스틴의 사무실

톰슨은 번스틴을 만나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묻지만 번스틴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케인의 청년기에 관해 들려주고는 릴랜드를 만나보라고 한다.


6 헌팅턴 기념 병원

톰슨은 릴랜드를 만나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묻지만 릴랜드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며 케인의 연인들, 에밀리와 수잔과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7 엘 란초

톰슨은 수잔에게 뭐든 떠오르는대로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수잔은 케인이 자신을 오페라 스타 만들고자 했던 시도들과 케인과의 결혼 생활 막바지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집사 레이몬드를 만나보라고 한다.


8 재나두

톰슨은 돈을 요구하는 레이몬드에게 로즈버드에 대해 묻지만 별다른 해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로즈버드의 정체는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이때 관객들만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요.


이어서 여섯 개의 회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회상뉴스입니다. 우리는 이 뉴스로부터 케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행진하는 뉴스’로부터 이 작품의 주인공인 찰스 포스터 케인의 인물 소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 회상대처의 일기입니다. 대처의 일기에서는 케인이 부모의 품을 떠나는 소년기, <인콰이어러>지를 경영하는 청년기 그리고 대공황 시기에 신문사 경영권을 대처에게 넘기는 중년기가 펼쳐지는데 주로 케인이 대처에게 각을 세우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케인의 지인, 딱 한 사람만의 기억을 매개로한 회상, 즉 특정인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회상은 대처의 일기가 처음입니다. 뉴스는 세상에 공공연하게 드러나있는 사실들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 회상이고요. 기억해둡시다. <시민 케인>의 첫 번째 회상은 뉴스인데 뉴스는 공적인 사건들만을 담은 객관적 회상이다. 두 번째 회상은 대처의 일기이고 이 대처의 일기는 특정인의 사적 기억을 담은 주관적 회상이다.


세 번째 회상번스틴의 회상입니다. 이 번스틴의 회상이 두 번째 주관적 회상입니다. 대처의 일기부터 번스틴, 릴랜드, 수잔 그리고 집사 레이몬드의 회상까지는 주관적 회상입니다. 즉 <시민 케인>에는 총 여섯 개의 회상이 있는데 첫 번째 회상인 뉴스는 공적인 사건만을 담은 객관적 회상이고 남은 다섯 개의 회상은 특정인의 사적 기억을 통한 주관적 회상입니다.


번스틴의 회상으로부터는 <인콰이어러>지를 성장시키는 과정, 그리고 대통령의 조카인 에밀리 노턴과의 약혼 발표까지가 그려집니다.


네 번째 회상릴랜드의 회상입니다. 릴랜드의 회상에서는 케인의 정계 진출과 함께, 케인이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에밀리와 이혼하고 수잔과 재혼한 뒤 재능이 없는 수잔을 억지로 오페라 스타로 키워내려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릴랜드의 회상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들여다봐야 하는 점이 있는데요. 릴랜드의 회상은 다른 이들의 회상과는 다르게 두 번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에밀리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 뒤 잠깐 현재의 시점으로 되돌아오는데 이때 릴랜드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사랑 때문에 결혼했네. 사랑···. 그게 그가 한 모든 것들의 이유일세. 그래서 정치에 뛰어들었고, 우리들로는 모자라 그는 모든 유권자들 또한 자신을 사랑해주길 원했지. 그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사랑뿐이었네. 이게 찰리의 이야기일세. 어떻게 그것을 잃었는지에 관한 이야기.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사랑을 줄줄 몰랐네. 물론 그는 자기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했지.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그는 항상 어머니를 사랑했던 것 같네.”



릴랜드의 이 대사에 찰스 포스터 케인의 이야기에 관한 모든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릴랜드가 사랑에 관해 말하는 이 대사가 <시민 케인>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회상을 단절하고 이 중요한 대사를 읊조리게 한 것일까요? 케인이 정계에 진출함과 동시에 수잔을 만나게 되는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케인의 몰락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즉 회상을 단절함으로써 전환을 나타낸 것입니다.


느닷없이 사랑 이야기를 하는 릴랜드


다섯 번째 회상수잔의 회상입니다. 톰슨은 수잔을 만나 뭐든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해달라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수잔에게는 로즈버드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수잔은 자살 기도로써 오페라 스타 되기로부터 벗어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케인과의 결혼 생활 막바지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수잔과 결혼하고 수잔을 오페라 가수로 키워내는 과정에서 케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지, 절친했던 친구 릴랜드, 아내 수잔까지. 케인은 수잔의 자살 기도 이후 세상과 단절하고 수잔과 재나두에서만 지내기로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재나두에 고립된 채 수잔까지 잃고 말지요.


여섯 번째 회상레이몬드의 회상입니다. 레이몬드는 만족스러운 금액-천 달러-을 약속받고 수잔이 케인을 떠나던 날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재나두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한 것에 반해 로즈버드에 관해서는 뻔한 대답만 늘어놓습니다.


자 그럼 <시민 케인>의 플롯 구성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시민 케인>의 플롯은 두 개의 시점에서 펼쳐지며 여덟 개의 분절과 여섯 개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 개의 회상은 여섯 개의 장소에서 펼쳐진다. 뉴스, 대처의 일기, 번스틴, 릴랜드, 수잔을 통한 여섯 개의 회상 중 첫 번째 회상인 뉴스는 공적인 사건만을 담은 객관적 회상이고, 대처의 일기부터 레이몬드의 회상까지 남은 다섯 개의 회상은 사적 기억을 매개로한 주관적 회상이다. 이때 릴랜드의 회상은 한 번 단절되는데 이 시점부터 케인의 몰락이 시작되므로 이 단절은 전환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시민 케인>의 플롯 구성이 한 눈에 보이시지요?



2 <시민 케인> 플롯 해설


다음으로 <시민 케인>의 플롯이 어떤 모형을 바탕에 두고 설계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회상인 뉴스가 일종의 지도입니다. 우리는 이 뉴스를 통해 케인의 주요한 삶의 궤적을 조망할 수 있게 됩니다. 이후 로즈버드를 추적하면서 다섯 사람의 회상을 매개로 케인의 사적인 삶을 접하게 됩니다. 즉 <시민 케인>의 플롯은 뉴스를 지도 삼아 회상의 증언들을 통해 케인의 생애를 재구성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뉴스와 대처의 일기까지는 케인의 소년기, 청년기, 중장년기가 뒤섞여 있는 편입니다. 관객들은 뉴스를 지도 삼아 퍼즐 맞추기를 해야합니다. 반면 번스틴의 회고부터는 케인의 삶이 비교적 연대기 순으로 펼쳐집니다. 후반부부터는 드라마적 긴장이 플롯을 이끌어갑니다.


재나두에서 쓸쓸히 퍼즐을 맞추고 있는 수잔


이렇게 드라마의 주인공이 명망을 얻고 절정에 이르렀다가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몰락해가는, 상승과 하강의 구도는 서양 비극의 전형적인 구도입니다. 널리 알려진 오손 웰스의 셰익스피어를 향한 관심, 그리고 그가 고전 예술을 지향한다는 것을 이 지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 또는 인품과 역량이 우리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명망과 번영을 누리다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과오(hamartia)로 인해 추락 또는 몰락하게 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훌륭한 비극의 조건입니다. <다크 나이트>와 <올드 보이>를 예시로 한 번 설명드리기도 했지요. 케인의 삶 또한 이 구도를 따릅니다. 콜로라도의 하층민 가정에서 나고 자란 케인은 은행가 대처의 양육 아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인콰이어러>지를 성장시키며 명망있는 언론인이 되지만 정치적 권세까지 손에 쥘 때 쯤 수잔과의 연애를 기점으로 명예, 동료와 친구들 그리고 연인까지 잃으며 쇠락하고 맙니다.


평생 사랑을 갈구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케인은 어머니와 떨어짐으로써 생겨난 원초적 결핍을 채우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너무나 간절하게요. 릴랜드가 말했듯이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도 대중들로부터 사랑받기 위함이었고, 수잔을 오페라 스타로 만들려던 이유도 실은 이때 대중들로부터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한 시도입니다. 케인의 수집벽 역시 그의 원초적 결핍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요. 하지만 끝내 잃어버린 사랑의 조각은 맞춰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민 케인>은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작품을 보신 분들은 수잔이 재나두에서 쓸쓸히 퍼즐을 맞추고 있던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퍼즐’은 케인의 원초적 결핍에서 비롯된 코드입니다. <시민 케인>이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도 하지요. 로즈버드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퍼즐 맞추기의 형태를 띠고 있고 로즈버드는 ‘어머니의 곁’을 가리키는 것인데 로즈버드를 추적하는 퍼즐 맞추기는 끝내 달성되지 못합니다. 고전 텍스트의 특징 중 하나인 형식과 내용의 일치까지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민 케인>의 플롯은 고전적이면서도 혁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부와 명예를 꿈꾸지요. 한편 케인처럼 거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던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필연적인 결과인냥 황폐해져갔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케인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보고 싶으신가요? 거대한 부, 대중의 관심, 정치적 권력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열망할까요? 이는 인간이 오랜 옛날부터 품어온 풀리지 않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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