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편 총정리
여러분이 작가가 되고 싶은 분이라면,
웹툰이든, 웹소설이든, 방송 작가나 영화 시나리오 작가든 극본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꼭 작가가 아니더라도 영화감독이나 방송 프로듀서 등의 연출가가 되고 싶은 분이든, 평론을 하고 싶은 분이든, 하다못해 친구들이나 지인들 사이에서 어떤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잘난 체라도 한 번 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 내용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직업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걸 알고 있거든요.
반대로 생각하면 앞서 말씀드린 직업의 일을 하고 싶은데 이걸 모르면 그 직업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작품을 보는 눈도 좋아질 수 없다는 뜻이고요. 이게 무엇이냐면, 드라마에 가장 기초가 되는 일종의 공식 같은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드릴 테니까 잘 따라오십시오.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라마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주로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극작품∙연속극, 영화의 장르나 요소 중 하나 정도를 가리킬 때 입니다만 지금 여기서 말하는 드라마는 넓은 의미에서의 드라마입니다. 문학에서도 쓰이고, 연극에서도 쓰이고, 영화에서도 쓰이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쓰이고, 만화에서도 쓰이는 ‘극’ 일반을 가리킵니다.
즉 정형화된 성격의 등장인물과 고조되는 가상의 상황이 펼쳐지는 서사 또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정의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정형화된 성격의 등장인물과 고조되는 가상의 상황이 펼쳐지는 서사 또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실존 인물, 실제 사건을 다루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고 해도 ‘극화’를 거치잖습니까? 극화한다고 할 때 이 극에 해당하는 게 넓은 의미에서의 드라마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극’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드라마, 넓은 의미에서의 drama인 것이에요.
영어 drama는 행동이나 목적을 향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 δρᾶμα(dráma)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한편 한자 劇(극)은 호랑이와 멧돼지가 맞서는 모습의 豦(싸울 거)자와 刀(칼 도)자가 합해져‘심하다’, ‘지나치다’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영어 drama와 한자 劇은 전혀 다른 뿌리를 가진 말이긴 하지만 이 두 글자가 가진 의미를 조합하면 극 또는 드라마의 개념이 여러분들의 머릿 속에 어렴풋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어 드라마는 행위를, 한자 극은 지나치다를 뜻하는 말이니까 굳이 이 두 의미를 조합하면 행위는 행위인데 그게 일상적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지나치고 과한 행위 쯤 되겠지요?
주인공의 목적을 향하는 행위 그리고 그에 맞물리는 고조되는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이 극 또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 클라이막스로 향한다라고 하잖습니까? 그걸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작가가 그냥 막 쓰는 게 아니에요.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술이 있습니다.
바로 극작술劇作術입니다.
그렇다면 이 극작술이 문학에도, 연극에도, 영화에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만화에도 적용되고 있겠지요? 따라서 여러분들이 이 극작술의 기초 개념을 알고 있으면 책, 영화관, 텔레비전 등에서 드라마를 볼 때 훨씬 더 잘 볼 수 있겠지요? 더 나아가서는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이 어떤 전략을 썼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직접 드라마를 써보려고 할 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그동안 저희 채널에서 보여드렸던 콘텐츠들을 예시로 드라마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영화가 아니더라도 마음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인생작 한 편 쯤은 있을 것입니다. 드라마 작품 중에서요. 소설일 수도, 연극이나 뮤지컬일 수도, 애니메이션∙만화일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의 등장 인물과 함께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면서 웃거나 울고 또 인간에 대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곤 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일면식도 없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인데다가 심지어는 실제로 살아있지도 않은 사람인 가상의 인물들에게 이렇게 공감하는 걸까요? 이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빠져들게 될까요?
그 이유는 바로 드라마의 가장 기본적인 설정이 드라마를 감상하고 있는 우리에게 등장인물의 의식과 감정을 들여다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A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름은 희망이고 나이는 스무살입니다.
희망이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님 집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아기 길양이에게 간택돼 집사가 되었는데 고양이를 돌보느라 정작 본인은 식비도 모자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통기한이 지난 편의점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곤 해요. 편의점 식품을 먹다가 사장님과 마주칠 때면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있는 날이면 더 그렇습니다.
희망이는 무명 격투기 선수거든요. 그리고 여자고요.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도 부모님이 희망이의 선수 생활을 심하게 반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편의점 진상 손님과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희망이가 이 손님을 메치는 바람에 병원비를 물어줘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는 본인 밥값도 없는 처지이죠.
어떻습니까?
희망이에게 딱한 마음이 드시나요? 희망이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궁금해지시나요? 한편으로는 희망이란 친구에 대해 잘 알게 된 것 같지 않으신가요?
지금 제가 구성한 희망이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가장 기본적인 설정에 따라 구성한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구상한 이야기도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감상자인 우리가 그 사람의 의식과 감정을 들여다보게 할만한 상황 속에 빠뜨린 것일 뿐입니다. 이때,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보편적인 측면에 주목하면서 원초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포인트인데요.
저희 채널의 세 번째 글인 <런닝맨에서 보는 스토리텔링의 기초 개념>이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벌레나 징그러운 생물을 무서워하는 송지효 씨가 무엇이 들어있을지 알 수 없는 상자 안에 손을 집어 넣는다. 벌써 송지효 씨의 반응이 궁금해지지 않으시나요?
평생을 색맹으로 살아온 할아버지가 66번째 생일에 가족들로부터 색맹 보정 안경을 선물받는다.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감격할지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렇게 감상자인 우리가 그 사람의 심경, 즉 의식과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어 할만한 상황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극작술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물들의 심경을 들여다보며 감상자인 우리는 인물과 가까워지게 되고 드라마가 구성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작품 속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저희 채널이 영화 분석 채널이니까 기왕이면 영상 작품이면 좋겠지만 어떤 형식이건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작품 속 주인공을 떠올려보세요.
떠올리셨나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 각자 다 다른 주인공들을 떠올리셨을 텐데요, 흥미롭게도 여러분들이 떠올린 그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뭘까요?
그들은 모두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고통받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인공 앞에 끊임없이 시련이 닥치게 하는 것, 이것이 드라마 설계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구성한 희망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방법을 따랐어요. 희망이가 끊임없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죠.
이때 주인공을 더 거세게 몰아붙이고 주인공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더 격하게 반응할수록, 그래서 주인공이 아주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힐수록 감상자는 더 자극받고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저희 채널의 네 번째 글인 <예능부터 영화까지 - 드라마 스토리텔링 전략의 기본>이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런닝맨> 담력 테스트 게임에서 멤버들이 겁을 잔뜩 먹고 기겁하는 반응이 더 클수록 시청자 입장에서는 재미있다는 점을 확인했었지요.
영화 <그래비티>는 어떨까요? <그래비티>에서 주인공 라이언은 인공위성 잔해와 부딪혀 동료와 기체를 잃고 우주 미아가 됩니다. 그야말로 극한 상황이지요. 영화 <그래비티>는 개봉 당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는데요, 작품의 주제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떠나 이 영화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이언이 혼자만의 힘으로 극한 상황을 이겨내야 하니까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명작 영화들도 이와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고담시에 선한 영향력이 전해주고 싶었지만 괴인 조커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원망을 받고, 하비 덴트의 죄를 뒤집어 쓰는 등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심지어는 자신의 정인인 레이첼까지 잃고 맙니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너무나 비참한 상황이지요.
몇 해 전 tvN에서 방영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의 아저씨>는 주인공 지안과 동훈이 고통받는 것으로 모자라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고난에 허덕입니다.
이처럼 드라마의 주인공, 등장인물들은 곤란한 상황 또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고 이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씁쓸한 사실이지만 주인공을 고통에 몰아넣는 이야기가 드라마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공과 등장인물을 힘들게 하는 것을 시나리오 용어로는 ‘갈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 강하고 더 거세집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저희 채널의 일곱 번째 글 <봉준호가 설국열차에서 보여준 탄탄한 기본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종착점에는 ‘끝판왕’이 기다리고 있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때마다 더 강한 적들, 더 강한 장애물들을 마주하게 된다. 익숙하시지요? 게임에서도 흔히 보는 구조입니다.
드라마의 전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언급한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드라마의 끄트머리로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영화가 끝날 때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럼 정리해보겠습니다.
드라마는 극작술의 규범에 따라 쓰인다. 극작술에서
①주인공은 곤경에 처한다.
②주인공은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③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인공의 행위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곤경과 장애물들을 시나리오 용어로는 갈등이라고 부르는데요, 감상자는 갈등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반응에 집중하게 되고 주인공의 의식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드라마로의 몰입과 감정이입이 이루어집니다. 끝으로
④갈등은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더 강하고 더 거세진다.
유튜브 콘텐츠에도 대본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만들 때는 당연히 작가가 있겠지요. 극본을 쓰는 현업 작가들은 이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기초로 해서 드라마를 써요. 따라서 이 내용을 모른 상태에서 드라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반대로 이 내용을 잘 알고 계시면 드라마 작품을 보는 눈이 점점 좋아지실 겁니다. 평론하고 리뷰하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이 기본적인 내용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꼭 알아두십시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또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