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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Nov 30. 2021

차가운 고립에 드리운 작은 온기

<혼자 사는 사람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외국 영화 중 올해의 발견이 플로리안 젤러의 <더 파더>였다면, 한국 영화 중 올해의 발견은 홍성은의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영화가 축복으로 다가올 정도로 정말 좋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향한 언급이나 관심이 현저히 적다는 것은 나로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와 시선은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만큼 의미가 있다.


주인공 진아(공승연)는 혼자가 편하다고 느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빠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며 홀로 살아가길 원한다. 낮에는 상담원으로 일하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면 아침에 틀어두고 간 TV 속 화면과 음성만이 유일하게 반겨준다. 그녀가 상담원인 건 혼자 사는 그녀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다. 상담원은 타인의 정보를 보고 이야기를 듣는 직업이다. 이를 소통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감정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팀장(김해나)이 신입 수진(정다은)에게 "왜 상담에 자기감정을 섞으려 하느냐"라고 꾸짖는 장면은 상담원이 오직 정해진 매뉴얼대로 '형식적인' 말만 반복하는 직업임을 알게 해 준다. 항상 핸드폰과 이어폰, 혹은 TV와 모니터로 다른 이의 삶을 보고 듣는 진아의 삶과 일치한다. 그녀는 항상 시각과 청각을 차단한다. 진아의 모습이야말로 혼자를 자처하고 상호 간 소통이 불편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진아의 삶에 변화가 생긴 건 신입 수진의 등장과 옆집 남자(김모범)의 죽음이다. 수진은 진아와 달리 붙임성이 좋다. 하는 일마다 어설프지만 그것은 처음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괜찮다'라는 말 한마디 해주지 않는다. 다짜고짜 욕설을 해대는 진상 고객에게 무조건 '죄송하다'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진아의 말에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송해야 해요?'라고 묻던 수진은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현대인처럼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형식적인' 인물이 된다. 하지만 상담원으로서 감내해야 할 '고독'을 차마 견디지 못한 수진이 무단결근한 후, 비로소 진아가 수진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용기를 낸 진아가 수진에게 전화를 걸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마침내 이야기한다. 이때의 연출은 앞선 장면들과 차별화된다. 이제껏 진아나 수진이 상담원으로서 통화를 할 때는 상대방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진아가 수진에게 통화할 때는 전화기 너머의 수진을 카메라로 비춘다. 앞선 장면들이 감정의 교감이나 진심이 하나도 없는 '형식적인' 절차였다면 후자는 마침내 진아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소통을 했다는 의미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수진의 울음소리와 이를 묵묵히 듣고 있는 진아의 뒷모습은 소통의 가능성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절제된 연출임에도 감정의 격정을 일으킨다.


수진과의 통화를 마친 진아는 집 밖으로 나와 옆집으로 향한다. 옆집 남자의 인사에, 죽음에, 새로 들어온 남자 성훈(서현우)에, 아파트 주민들이 참여하는 옆집 남자의 제사에 무관심했던 그녀였지만 용기를 내 옆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차마 들어가지는 못한다. 아직은 무리인가 보다. 미처 옆집 남자의 외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죄책감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부담 탓이리라. 그 대신 문에 기대고 홀로 생각에 잠기는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옆집 남자를 위로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성훈이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우는데, 진아에게 정말로 그냥 담배를 태울 때와 성냥으로 담배를 태울 때의 연기가 다르다며(성훈의 말은 진아가 죽은 옆집 남자에게 들은 말이다. 이후 진아가 성훈에게 이를 말한다) 직접 보여준다. 진아는 아무 말 없이 담배 연기를 바라본다. 예전에 옆집 남자의 말을 무시한 것에 미안하다는 듯, 이제라도 진심으로 들어주겠다는 듯 진아의 시선은 담배 연기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혼자를 자처한 이들의 고독과 감정의 요동을 섬세하게 연출하였으며, 그럼에도 소통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진아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이는 건 이 영화가 현실을 정확히 포착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설령 남들과 소통하는 것이 아직 낯설어도 괜찮다. 쉽게 다가가지 못해도 괜찮다. 진심으로 작별 인사를 건네는 통화 한 번, 옆집 문에 기댄 것, 진심으로 말을 들어주는 것, 진심으로 바라봐 주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영화의 마지막,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버스 창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는 진아의 모습에서 걱정이 들지 않은 건 우리도 진아처럼 한 발자국 걸어 나갔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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