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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Nov 07. 2023

트라우마로 향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해석 2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그어살>이 만들어낸 소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근대와 전쟁이라는 배경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이야기와 합쳐져 뒤틀린 소년을 낳았다. 순수와 긍정으로 가득한 지브리의 소년이 아닌 슬픔과 트라우마에 신음하는 소년이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이었다. 이는 영화 속 기묘한 여정과 이세계를 살펴보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2부에서는 메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이세계로의 모험을 다루려 한다. 새어머니 나츠코를 구하러 가는 여정, 히미(아이묭)와의 만남은 마히토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다.


반전된 꿈

1부에서 언급한 대로 마히토의 어머니는 화재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머니의 죽음은 곧 마히토의 트라우마다. 어린 소년이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깍듯하게 행동한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자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과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꿈으로 나타나 어머니의 부재를 상기시킨다. 마히토는 외면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트라우마는 그를 옭아맨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장면을 살펴보자.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마히토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2층 계단에 앉는다. 잠시 후 현관에서부터 불길이 빠르게 치솟더니 어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마히토, 구해줘. 마히토.” 불길이 마히토의 몸을 감싸고 자신을 구해달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히토는 혼란스러워한다. 바로 다음 장면, 마히토가 눈을 뜨며 깨어난다. 당혹스럽다. 앞서 일어난 장면은 마히토의 꿈이었던 걸까.


마히토는 불길이 치솟으며 자신을 감싸는 걸 본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달라는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어머니는 화재로 사망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결혼했다. 새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했다. 마히토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아마도) 마히토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현실이 두렵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가 필요하다...

 

사실은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위로받고 싶다는 갈망이 이러한 환상과 환청, 꿈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다시 말해, 마히토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구원의 요청이 어머니가 마히토에게 보내는 구원의 요청으로 반전되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마히토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


상승과 하강, 의식과 무의식

영화에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반복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마히토의 무의식 혹은 꿈에 따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무의식과 꿈의 언어는 현실의 언어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싣는 장면이 이후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왜가리(스다 마사키)와의 대면이다. 마히토는 왜가리를 향해 목검을 휘두르며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이에 왜가리는 “당신의 모친께서는 살아 있습니다. 당신이 구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며 마히토를 당황하게 만든다.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마히토 주위로 잉어가 뛰어오르고 두꺼비들이 달려든다. 이때 나츠코가 나타나 화살로 왜가리를 쫓아내고 저택의 할머니들도 뒤를 따른다. 나츠코와 할머니들을 확인한 마히토는 쓰러진다.


다음 장면, 마히토의 신체가 물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물이 빠져나가고 마히토는 방 안에서 깨어난다. 이어 자신을 간호하러 온 할머니에게 왜가리를 묻자 할머니는 의아해하며 꿈을 꾼 것 같다고 말한다. 왜가리와의 대면도 꿈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앞선 장면은 달리 보인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왜가리의 말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이전에 꾼 꿈의 연장선일 것이다. 중요한 건 나츠코와 할머니들이다. 나츠코와 할머니는 왜가리로부터 마히토를 구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왜가리가 어머니를 언급하며 마히토의 트라우마를 계속해서 건드리는 건 마치 마히토로 하여금 트라우마를 바라보라고, 트라우마로 향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나츠코와 할머니들의 등장은 무의식과 트라우마로 향하려는 마히토를 막아내는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는 길은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마히토의 새로운 보호자인 새어머니와 할머니들이 개입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마히토의 신체는 꿈에서 현실로 깨어나는 것을 은유한다. 즉, 영화에 나타난 상승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향하는 마히토를 나타낸다. 재밌는 건 반대의 상황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탑에서 왜가리의 안내를 받으며 이세계로 향할 때는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마히토는 이세계로 ‘떨어진다’. 하강의 이미지다.

 

결국 영화가 그려내는 본격적인 여정은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이어진다는 걸 알려준다. <그어살>은 마히토가 자신의 무의식, 그리고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로 향하는 여정이다.


이세계로 향한 까닭은

본격적으로 이세계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가 이세계로 향하는 계기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데려오기 위해 이세계로 향한다. 마히토는 왜 나츠코를 데려오려고 하는가. 나츠코는 자신의 어머니와 똑 닮았지만 어머니가 아니다. 이모가 한순간에 새어머니가 되어버렸고 동생까지 임신했다. 마히토가 보고 싶은 건 어머니이지 나츠코 이모가 아니다. 기댈 곳 없는 마히토는 그렇기에 기본적인 예의만 갖출 뿐, 나츠코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흔들린 건 어머니가 선물해 준 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나서다. 영화상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평론가 후지츠 료타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영화에 소개된 페이지에는 주인공 코페르의 어머니가 “후회의 기억이 있기에 마음속의 친절함을 솔직하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의 친절도 절실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과 함께 코페르에게 깨달음을 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마히토는 어머니가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만 같고, 나츠코에게 쌀쌀맞게 대한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느껴 눈물을 흘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나츠코가 실종되고 마히토가 밖으로 나설 때 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카메라가 다시 한번 보여주는 건 나츠코를 찾으러 떠난 것이 이 책의 영향 때문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히토가 왜가리를 따라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정말로 어머니가 살아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꿈의 내용과 왜가리의 전언은 마히토로 하여금 어머니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그 실체를 찾아 떠나도록 만든다. 두 번째, 나츠코를 구하러 가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나츠코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며 가족의 구성원이다. 아직 마음을 완전히 연 것은 아니지만 나츠코는 마히토의 새어머니다. 이제 마히토는 기꺼이 이세계로 향하는 것을 결정한다.

 

이렇듯 반복되는 꿈의 이미지,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오려는 무의식의 영역과 기꺼이 무의식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이세계가 마히토와 미야자키의 무의식이 형상화된 곳임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마히토는 나츠코를 찾아야만 한다. 무의식에서 새어머니를 찾는 과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트라우마를 인정한다는 것

마히토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겨우 나츠코가 있는 곳을 알아낸다. 그곳은 돌로 이루어진 탑이었으며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니, 들어가선 안 되는 곳으로 취급된다. 나츠코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면 계단을 계속해서 내려가야 한다. 이때 돌은 사람이 들어오는 걸 거부한다. 특히 나츠코가 머무르고 있는 산실에서 돌의 방어는 가장 심해진다. 이제야 확실해진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으러 가는 여정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여정이다.

 

트라우마는 무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나츠코가 있는 산실로 계속 내려가는 건 그래서다. 산실에 가까워질수록 돌의 거부 반응이 커지는 것도 방어 기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히토는 산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금껏 외면해왔던 자신의 두려움, 트라우마를 직접 확인하기로 결정한다. 마히토는 무엇이 두려운가. 첫 번째, 산실에 누워있는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정말로 그때 화재로 죽은 것이다. 두려움 두 번째, 만약 산실에 있는 사람이 나츠코라면 내가 그녀를 싫어한 사실을 들키는 것.


마히토는 산실에 누워있는 인물을 깨운다.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인물이 깨어난다. 트라우마가 마히토를 바라본다. 어머니, 나츠코처럼 보이는 인물은 마히토를 향해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산실의 인형은 마히토에 들러붙으며 방해한다. 함께 나가자며 손을 내미는 마히토,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난 네가 싫어! 여기서 나가!”

 

마히토는 큰 충격을 받는다. 산실에 있는 인물이 어머니가 아닐 것이라는 첫 번째 두려움이 실현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싫다고 소리치는 나츠코의 말. 나츠코를 싫어한 사실이 나츠코에게 들킨 것만 같은 두 번째 두려움도 실현된다. 자신이 먼저 싫어했기에 나츠코도 싫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앞서 구해달라는 어머니의 음성이 사실은 마히토 자신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는 걸 떠올리면 나츠코의 말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트라우마를 직면한 마히토는 순간적으로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꺼낸 한마디. “나츠코... 나츠코 엄마!” 이 한마디는 앞서 언급한 두 개의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회심의 한 마디다. 산실에 있는 인물이 나츠코로 밝혀지면서 동시에 어머니는 죽었다는 게 밝혀진다. 여기서 나츠코를 향해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른 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인정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곧 두 번째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싫어한 사실이 마히토를 향한 나츠코의 “싫어.”라는 말로 돌아온다면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향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게 된다. 이에 마히토도 마음을 열고 새어머니를 향해 “어머니”라고 소리칠 용기가 생긴 것이다.

 

이는 트라우마의 극복이 아니다. 트라우마의 인정이다.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과거의 상처로 받아들였다. 마히토는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했고,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했다. 트라우마와 상처는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전처럼 괴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마히토는 트라우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불의 소녀 히미

마히토의 트라우마 회복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더 나아간다. 바로 히미(아이묭)의 존재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히미는 이세계 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뜻밖의 정체를 가졌는데, 바로 마히토의 어머니라는 것.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는 마히토를 구해주고 나츠코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 동참한다.

 

여기서 우리는 히미가 마히토의 어머니이면서 불을 다루는 소녀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화재로 사망한 어머니가 불을 다루는 소녀로 나타난 건 마히토의 트라우마가 동화적 상상력으로 변형된 것이다. 불에 의해 목숨을 잃은 어머니는 불을 통해 목숨을 구해주는 존재가 된다. 어머니의 위로가 필요했던 소년은 히미가 준 잼과 빵을 먹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리고 새어머니를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받는다. 다시 말해, 화재와 어머니의 죽음은 불을 다루는 용감하고 착한 소녀 히미로 바뀌면서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마지막 히미의 선택도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의 후반부, 현실로 돌아가려는 마히토는 다른 시간대의 문으로 향하려는 히미를 말린다. 만약 히미가 현실로 복귀한다면 미래에 화재로 죽을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히토는 “히미는 살아야 해.”라며 현실로 돌아가지 말 것을 부탁한다. 이에 히미는 “불은 무섭지 않아. 너를 낳는 건 멋진 일이잖아. 마히토, 너는 멋진 아이야.”라며 마히토를 안아준다.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마히토의 죄책감이, 어머니를 앗아간 화재의 공포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소중한 존재였을까에 대한 회의가 순수한 소녀의 모습을 한 히미의 진심 어린 말로 한꺼번에 해소된다.


이처럼 우리는 한 소년이 꿈,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이야기를 보았다. 소년은 끝내 트라우마를 인정하였고 한 단계 성장했다. 이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본인이 외면했던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이에 다가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어지럽게 격동하는 <그어살>의 세계에서 어머니를 찾아가고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무의식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남았단 말인가.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큰할아버지와 이세계를 좀 더 깊게 살펴봐야 한다. 거기에는 단순히 마히토의 기억이나 트라우마를 넘어 창작, 세계,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어살>을 통해 최종적으로 전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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