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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Oct 09. 2021

믿음의 늪에 빠진 자들

<독전>(Believer)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첫 관람 당시, 나는 이 영화에 회의적이었다. 중반까지 이어져 온 압도적인 힘과 유려함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무너졌다. 유머 남발과 과잉의 이미지 남용 때문이겠지만, 반전에 대한 강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 선생이라는 사실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동시에 공허함만이 남아 앞서 봐온 것들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영화가 의도한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화는 우리를 배반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시킨 것이다.


<독전>은 신기하게도 영문 제목을 원작처럼 <DRUG WAR>가 아닌 <BELIEVER>로 칭했다. 나는 <독전>보다 영문 제목이 이 영화의 주제이자 정체성이라고 본다. 이는 타이틀이 올라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오프닝 이후 타이틀이 뜰 때 한글 제목과 영문 제목이 동시에 나온다. 그런데 엔딩 이후 한 번 더 타이틀이 올라올 때는 영문 제목만 나온다. 결국 이 영화는 ‘Believer’, 즉 ‘믿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오프닝으로 가보자. 원호(조진웅)가 차에 기름을 넣고 어디론가 향한다. 카메라는 원호의 차와 끝없이 이어진 설원의 도로를 한 프레임에 넣고 이를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오프닝은 영화의 방향과 주제를 알려준다. 이를 짐작해볼 때, <독전>의 오프닝은 영화가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는 원호 혹은 인물의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그는 목적지로 가야만 한다는 믿음만 가진 채 끝없이 이어진 도로를 달린다. 저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믿고 있는 대상이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믿는 자는 원호뿐 아니라 브라이언(차승원)도 포함된다. 그는 첫 등장부터 신앙으로 무장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한 치도 의심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기도합시다" 등의 대사에서 느껴지듯 기독교적 신앙이 뚜렷하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이 선생이라 칭하며 마약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려 한다. 그가 믿는 것은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 이 선생이며 그는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후반부, 락(류준열)의 정체가 이 선생임을 알게 된 브라이언은 처음엔 믿지 않는다. 이후 그가 진짜 이 선생임을 알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자는 말을 한다. 이는 실제 신을 만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영화는 맹목적인 믿음의 끝은 공허하다는 걸 말해준다. 영화 속에서는 원호가 왜 이 선생에게 집착하는지 명확한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원호는 이 선생의 존재를 믿고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이 선생이 락이라는 사실은 자신의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계기가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2001)의 주인공 레너드처럼 원호는 자신이 쫓는 존재가 실존해야만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쫓는 존재가 없으면 자신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원호가 마주친 진실의 실체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처음에 기다린 용산역이 마약 조직의 아지트이며 옆에 있던 락이 이 선생이라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그는 아무도 아니며 모두이다’라는 영문 포스터 문구처럼). 이를 통해 짐작하건대 엔딩에서 죽은 자는 원호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락이 죽인 것일까? 내 생각에는 삶의 의미를 잃은 원호가 자살했다고 본다(이는 <독전-익스텐디드 컷>에 의해 부정당한 가설이다).


<독전>은 생각할수록 아쉬운 작품이다. 나처럼 예고편을 보고 최고일 거라 믿은 이들은 영화의 실체에 적잖이 실망하고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마치 영화 속 원호의 반응과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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