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밍꼬 Feb 14. 2023

싯다르타 8장 강가에서, 안식 그리고 새로운 삶

안식을 통해 새 삶을 부여받습니다.

  늦은 가을비가 내리고 나자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남편과 아이들은 두꺼운 외투와 함께 이미 집을 나섰고  나는 어린이집에 막내를 데려다줘야 하는데 몸이 빠릇하지 못하고 계속 늘어졌다. 싸늘한 바깥공기와 다르게 거실로 내리치는 강한 햇빛 사이로 지끈한 두통이 찾아왔다. 한동안 찾지 않던 타이레놀이 찾아지는 두통이다. 머리가 아플 만도 하지 가을의 시작부터 너무 무리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시작되며 나는 신이 나 있었다. 코로나는 이미 한 켠에 제쳐 놓은 위드코로나 시대. 여전히 마스크는 쓰지만 거의 일상이 돌아온 생활이었다. 주말이면 가는 계절이 아쉬워 아이들과 밖에 나갔고 평일 낮에는 그동안 배우고 싶던 것들을 시간을 쪼개며 배우러 다녔다. 오후가 되면 네 명의 아이들을 이곳저곳에서 데려와 도서관에 문화원으로 돌아가며 수업을 다녔다. 월요일이 되면 이번 주도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하며 금요일 오후면 이번 주도 무사히 지났구나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몇 주를 지내던 중 지난주 수업 하나가 휴강이었다. 수업이 없으니 숙제도 없고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 사이로 긴장의 끈이 풀린 틈을 타고 내게 두통이 찾아왔다.  마흔이 목전인 나는 이제 이 신호의 의미를 안다. 너무 달리고 있으니 쉬어가라고 말을 건 것이다. 내 인생에 이런 과부하가 얼마나 많이 찾아왔다 갔을까?



   자신의 정원을 떠난 싯다르타의 마음에도 권태와 번민이 가득했다. 젊은 시절 건너온 그 강가에 서서 모든 것이 끝나기를, 죽음으로 안식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마음에서 나지막이  울리던 경고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공허감 속에 그 강기슭 야자나무 아래에 서서, 눈을 감고 죽음을 향하여 떨어지려는 순간 그의 영혼 후미진 곳에서 소리가 울려왔다. <옴>.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말이다. 그는 그 순간에야 비참함과 미망에 빠져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그는 야자나무 밑동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죽음을 원하는 싯다르타에게 무엇이 필요했을까? 나를 휘몰아치고 옭아매던 것들에서 떨어져 나온 '온전한 쉼'이 아니었을까? 그가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오랜 시간이 흐른 느낌이며 이전의 삶은 예전의 삶같이 느껴지고 자신이 그 삶을 버리고 떠났음을 알게 된다. 싯다르타는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은 살면서 수 없이 다시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 같다. 죽음과 같은 안식을 통하여 지친 삶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리비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단편적으로 ‘성에 대한 이론’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지만 내가 얕게나마 이해한 바로는 성 에너지로 오해된 리비도는 ‘생’을 향한 에너지로 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 리비도가 들어 있다는 것은 즉, 모든 행동에는 '생을 향한 에너지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죽음을 향하는 행동조차.


   싯다르타가 강가에서 원했던 죽음 안에도 사실은 생의 에너지가 가득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죽음과 같은 안식을 원했던 것이다. 나도 지쳐가는 나의 일상에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기 전에 나를 살피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될 것 같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할 일이 많지만 거실에 앉아 잔잔한 노래 몇 곡을 들으며 몰려오는 잠을 물리치지 않았다. 얼마나 잤을까 두통을 물러갔고 몸을 씻고 나와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글을 쓰기 위해 앉았다. 오늘은 굳이 무엇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앉아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지친 나를 잠시 쉬게 하지만 내일 또 나를 가다듬어 글을 쓸 것이다.     

 

  싯다르타는 쾌락, 가치, 부를 위해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던 단식, 사색, 기다림을 버렸다.  이를 깨달은 지금은 머리카락이 반백이 다되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순간 싯다르타의 마음속에서 울리던 옴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를 잡아 주던 옴의 소리는 모조리 잊혀진 듯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마음 깊이 쌓았던 단식, 사색, 기다림의 힘이었을 것 같다. 싯다르타에게 단식, 기다림, 사색이 있다면 나는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그것을 글쓰기로 삼겠다 싶었다.  그러니 함께 가기를 약속한 동반자처럼 급할 것이 없다.


 싯다르타가 자신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혼잣말을 할 때 강물도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발견한다. 허송세월 같았던 그의 몇 년은 좋고도 험난했다. 사실 우회로 같던 그 길은 제대로 난 길이었다. 절망과 나락에서 자비를 체험하고 옴을 듣기 위해 가야만 했던 길이었음을 깨닫는다. 싯다르타는 앞으로 나의 길 이끄는 곳이 어디든 그 길을 가리가 다짐하며 기뻐한다. 이제야 모든 것을 체험하며 알게 된 것이다. 강물에 빠져 죽은 것은 피곤과 절망에 빠진 옛 싯다르타였다.


 소설 싯다르타의 문장들은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나에게 믿음을 준다.  인생의 강 어디에 내가 서 있는지 한눈에 보이진 않지만 흐르는 강처럼 가야 할 길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 길에서 내가 지쳐 나가지 않도록 나를 돌보며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거다. 여태까지의 나의 인생이 많은 도전과 경험으로 무엇이든 담으려 했다면 이제는 그것을 꺼내어 되새김하고 다듬고 부족한 것을 더해가는 삶을 살고 싶다. 단잠의 휴식으로 사라진 것은 지친 나이며, 안식의 시간을 통하여 나는 매번 다시 태어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싯다르타 2부 7장 윤회, 위로의 기도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