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에서 깨어난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 강을 건네준 뱃사공이 생각났다. 지금부터의 삶도 그때 그 오두막이 출발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뱃사공을 찾았다. 뱃사공의 이름은 바주데바. 흐르는 세월에 그도 늙어있었다.
바주데바는 싯다르타가 지내온 인생을 매우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는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뒤 이곳에서 함께 지내길 바란다고, 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거라고 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드물게 말했고 말없이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싯다르타의 미소는 뱃사공의 미소를 닮아갔다. 싯다르타는 배를 다루는 법, 고요한 마음, 기다림, 활짝 열린 영혼, 판단과 견해 없이 귀 기울여 듣는 법을 강으로부터 배웠다.
나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손가락 하나로 많은 걸 해결하는세상을살지만 사실수없이복잡한 자극속에 끼어 사는 듯하다. 그 사이가까스로발을 딛고 살아가는 나의 매일이아슬아슬하다. 그러다보면 세상을 대하는 나의 예민성도 높아진다. 모두가잠든 한 새벽에잠시 물을 마시러일어났다. 깊은 새벽임에도 홀로 불을밝힌건너편 집의전등 빛에서 조차벗어나질 못하다.
이런 불편을 알고도 모르고도 산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극되는 그 예민성은 내 삶에 부스러기를 만든다. 이 부스럼은 내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넘어가도 될 일에 과도하게 반응하게 한다.
나는 수많은 자극에 눈을 감고 싶다. 막 잠에서 깨어난 싯다르타가 강의 소리를 들으며 사는침묵하는 삶처럼나는 내 삶에 침묵을 찾아 넣는다. 그렇게 되기를 돕는 건 글쓰기이다. 아침이 되어 가족이 모두 나간 집의고요함 속에서 나는 쓸거리를 생각한다. 생각과 글에 집중한다.이 고요함이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곧 적응된다. 고요함에 순응되면내 입에 넣는 초콜릿 간식 한 조각조차진한 자극이 된다. 마음이 가라앉으면일상에서 보지 못한 생각이 떠오른다.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나는 침묵의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에게 침묵의 시간은 글과 함께 찾아왔다. 아이 넷을 키우며 어느 여유에 글을 쓰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여유가 있기에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모순적으로 글을 쓰며 나만의 시간을 챙기는 법을 알았다. 전에는 빈집을 대충 치우고 핸드폰을 쥐고 있거나 TV를 틀어 놓고 흐르는 시간에 나를 던졌다. 그렇지만 글을 쓰며 나는 시간의 흐름을 타는 법을 알았고 시간은 주도적으로 내 것이 되었다.
글을 나에게 강에 띄운 나룻배 같았다. 글 속에서 나는 이전의 나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나의 상상한다. 삶은 강물처럼 끊이지 않고 흐르지만 언제나 존재하듯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과거의 나를 보고 미래의 나를 꿈꾼다. 글은 변하지 않지만 그걸 바라보는 그날의 나에 따라 글 속에서나는 항상 새로운 모습이다. 글은 나의 뱃사공이다. 서투른 나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주고 내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나를 기다려 주고 함께해 준다.
강가에서 몇 년을 지내며 평화를 찾은 싯다르타에게 새로운 사건이 나타난다. 세존이 위독하다는 소문에 많은 이들이 세존을 향하는데 카말라도 아들과 함께 부처를 향한 순례를 하고 있었다. 어린 아들과의 여행은 쉽지 않아서 그녀는 아들을 달래고 꾸짖으며 가고 있다. 여행길, 잠시 앉아 쉬던 때 카말라는 독사에 물린다. 쓰러진 엄마를위해 도움을 청하는 아이를 본 바주데바는 그들을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고 싯다르타는 한눈에 그들을 알아본다. 싯다르타의 품에서 잠시 의식을 찾은 카말라도 그를 알아본다.
오랜시간 후의 만남. 카말라가 본 싯다르타의 얼굴에서 평화가 있다. 카말라는 그의 품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얼굴에도 젊은 시절과 죽음이 함께 있다. 모든 생명의 불멸성과 영원성을 함께이다. 그녀는 떠났고 싯다르타는 아들을 얻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자신 뿐이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고 우아하게 도도할 수 있던 젊은 날의 싯다르타가 남긴 아이가 늙은 싯다르타의 곁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