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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밍꼬 Sep 08. 2023

싯다르타 10장 아들, 아버지로서의 싯다르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일 수밖에, 부모로서의 내 모습

  싯다르타는 아들을 기쁘게 맞았고 오두막에서 함께 살기 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싯다르타는 아이를 보살피고 슬픔을 존중하고 자신을 아버지로 사랑할 수 없마음을 이해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소년은 두 노인에게 낯설고 불손하게 굴었다. 싯다르타는 아들이 옴으로써  행복과 평화가 아닌 고통과 근심이 찾아온 걸 이해하기 시작했다.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에게 아이를 시내에 데려다주고 그곳에서 살게 하라 했지만 싯다르타는 그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이가 과거의 자신처럼 쾌락과 권세의 늪에 빠져 윤회의 굴레에 빠질 것을 걱정했다.     




  강가에서 평화에 깃들어 살던 싯다르타의 삶에 아들이 찾아온다. 강이 알려주지 않은 것이 있다면 부모가 되는 것일까? 갑자기 아들이 생겨 아버지가 된 싯다르타의 모습은 그렇게 인간적일 수 없다. 나는 싯다르타 10장을 읽는 내내 처음 부모가 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지 연민이 넘쳐왔다. 나도 그랬던 그때의 내 마음도 떠올랐다.


  육아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로 발견하는 일이었다. 하루의 끝에선 참지 못하고 화를 낸 추한 내 모습을 마주한다. 하루 걸러 하루를 반성하고 잠든 아이를 보며 사과한다. 아이가 어릴수나만 의지하는 아이를 보면 내가 자는 일, 먹는 일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일까지  기본 욕구가 이렇게까지 박탈되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서글픈 날이 부지기수였다.


아이가 자랄수록 육체적 노동은 물질적임과 정서적 노동으로 변할 거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노동’이는 말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로부터 오는 행복과 별개로 육아에는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키운 그 아이가 내 뜻 같지 않다면? 아이를 나와 다른 존재로 ‘동등히 존중’해야 하는데, 또 별일 많은 이 세상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데. 아이와 함께 하는 어느 길은 무엇조차 쉬운 게 없다.   부모가 되는 범은 오랜 시간 강을 보며 깊은 평화를 얻은 싯다르타에게조차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그 어려운 일은 우리 주변에 많은 부모들이 해내고 있다.      




  소년에게 싯다르타는 위선적이고 지겨운 존재였다. 어느 날 땔감을 모아 오라는 싯다르타의 말에 소년은 분노와 원한을 쏟아내고 돈과 배를 훔쳐 집을 나가버린다. 소년의 뒤를 쫓아가 다시 찾은 배 안에는 더 이상 좇지 말라 하는 듯 노가 버려지고 없었다. 바주데바는 떠난 아이를 보며 싯다르타가 해주어야 하지만 소홀하고 외면하며 해주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선택하여 제 길을 간 것이라 했다.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에게 아직도 아들이 원하는 것을 모르겠냐고 물었지만 싯다르타는 여전히 도망친 아들의 뒤를 따르기 위해 바주데바에게 작별을 고했고 바주데바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나도 아이 넷을 키우고 나서야 어린아이를 키우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항상 자라고 그에 따라 나에게도 새로운 시기의 부모 역할이 주어진다. 곧 오게 될,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처럼 사춘기 아이의 부모가 될 나의 모습이 두렵다. 미래의 나에 대한 다짐으로 아들의 뒤를 따르는 싯다르타의 마음이 읽혔다. 소년은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다 싫은 사춘기 나이였을 거다.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박탈당했고, 이어지힘든 일상과 가난 속에서 어머니까지 잃었으니 소년의 깊은 상실감을 누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떠난 소년을 쫓아가며 이 일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어 안달해하는 싯다르타를 보며 나는 소설의 앞부분이 떠올랐다. 집을 떠나겠다는 싯다르타를 보낼 수밖에 없어 밤을 지새우던 아버지. 사람을 앞으로만 가는 것일까? 내가 내 자식에게 향하는 애타는 마음만 보일 뿐 뒤돌아 나의 부모에게 했던 나의 행동들은 차마 보지 못하는 걸까? 그 이기적인 사람이 여기 있다.  나는 지난날 나의 모습을 떠오르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직은 그 마음이 너무 타올라 반성하기 위해 또렷하게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안락한 삶을 스스로 박차고 집을 떠나던 어린 싯다르타를 응원했던 것처럼, 믿을 곳 하나 없이 혼자의 몸으로 나루터 집을 도망치는 소년의 용기를 여전히 응원한다. 가야 할 곳을 알고 떠나는 아이의 용기를 응원한다. 영원히 내 품에서 키우고 싶지만 애써 떠나보내는 부모의 아리고 걱정 어린 마음을 안아 주고 싶다. 세대를 거쳐 모두에게 되풀이되는 떠남과 떠나보냄 속에서 우리는 나아가고 성장하는 거라 믿는다.       




  한참 숲을 헤맨 싯다르타는 그제야 아이가 무사할 거란 것도 쫓는 일이 부질없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알고 있었지만 사실 아들의 모습은 다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었을 거다. 그는 어느새 카말라를 처음 만난 정원에 닿아 있었다. 지난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며 또 윤회를 숨 쉬었다. 순간 구토감과 자기 파멸의 욕망을 다시 느꼈지만  옴의 힘으로 다시 자신을 치유한다. 자신이 아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도, 집착하고 애착하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닫는다. 공허감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며 오랜 시간 무감각 상태에 빠져있던 그를 깨운 것은 환한 미소의 바주데바였다. 둘은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 아무도 그의 상처에 대해. 아이의 도망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깨달은 자인 싯다르타마저도 그렇다. 삶은 사람은 몇 번을 깨닫고 몇 번의 좌절을 하게 만드는 걸까? 좌절은 밀려오는 파도처럼 찾아온다. 살아가며 성숙해진다고 좌절이 우리를 피해 가지 않는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해졌다면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다시 평온한 나로 돌아오도록 나를 다스리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성숙하고 깨닮음과 함께하는 삶이란 좌절을 인정하고 그 파도를 안전하게 타는 법을 알아가고, 실제로 그 일을 잘 사용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잘하려 해도 자식 앞에서만은 그 일이 쉽지 않은 것 같다. 싯다르타도 아이가 떠난 일이 큰 상처로 남았지만 이 상처가 언젠가 활짝 꽃피고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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