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에게 첫 단추는 중요하다.
안녕하세요. 최애오입니다.첫 출판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이제는 브런치에 어느 정도 글을 실어보려고 해요. 글을 읽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과 그의 시선으로 본 세상의 이야기에 감화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스무 살을 보낸 지 10여 년 동안 대외활동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여가활동까지 족히 30개는 넘는 활동들을 한 것 같아요. 지금은 스타트업에서 하나의 브랜드가 시장에서 생존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브랜드 엑셀러레이터 역할을 하고 있어요.
2017년 육아 카테고리 바이럴 마케터과 사업 기획, 영유아 교육 영업, 디지털/가전 브랜드 바이럴 마케터에서 MD를 거쳐왔어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각각의 필드에서 경험을 하고 경력을 쌓아 교집합을 만들어 단단하게 쌓아 올리고 있어요.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의 사람이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경험들과 그 과거들에서 느낀 바들이 지금 제게 작용하는 힘들을 나누고 싶어요.
저의 시선으로 함께 해요.
2011년 12월 수능을 끝내고 부모님께서 대학이 가기 전까지는 고등학교 때와 똑같은 용돈 한 달에 25만 원을 주신다는 이야기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결론을 내리고 말 한 건 해야 하는 성미를 아는 탓에 엄마는 한숨을 쉬고, 아빠는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냐며 겁을 주었지만 나는 12월에서 2월까지 나를 위한 보상으로 #내돈내산 을 하고 싶었던 듯하다. 용돈을 받으면 "이런 쓸데없는 건 왜 사."라고 잔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으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초1과 고3을 제외하고는 실장(반장), 부실장(부반장), 전교 부회장 등 감투를 써 왔다. 열아홉이 사회를 대상으로 적을 수 있는 스펙은 고작 그뿐이었다. 지금 어느 누가 회사에서 반장, 부반장한 이력만으로 뽑아줄까. 열아홉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스펙으로 앤티앤스프레즐 지점에 아르바이트 지원을 했고, 면접을 갔다. 당시 앤티앤스프레즐은 서울을 제외하고 몇 군데 프랜차이즈로 확장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현대백화점 대구점은 당시 개업한 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생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백화점 내 모든 층과 직원, 고객들 모두가 '시작'이라는 상기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백화점 교육을 마치고 매장으로의 첫 출근은 2011년 12월 24일, 당시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인해보니 맞다.)
현대백화점이 오픈하고 처음으로 맞는 연휴, 거기다가 온 가족과 연인들이 백화점에서 즐기는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부터 오늘의 매출을 기대하고, 10시 백화점 오픈 전에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 자리도 좋았던 터라 그때에는 현대백화점 지하 2층 길목 바로 앞에 엄청 조그마한 코너 자리로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5명이 복닥복닥 일을 했다. - 여담으로 앤티앤스프레즐은 지금이야 스틱형태도 많지만 당시에는 오리지널과 아몬드만 스틱이 있고, 나머지는 나비모양의 빵 형태뿐이었는데, 그 빵도 컷팅하는 순서가 따로 있기에 첫 출근을 한 나로서는 응대와 컷팅을 동시에 하는 멀티가 불가능했다.
그렇게 뒤에서 반죽을 하고 프레즐에 코팅하는 버터를 계속해서 녹였다. 앞에 말했듯이 당시 앤티앤스프레즐은 지금의 노티드, 랜디스도넛과 같은 열풍이 있었고 백화점 지하 2층에는 앤티앤스프레즐을 위한 줄이 쭉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놓친 게 있었으니, "이스트는 뜨거운 물을 만나면 죽는다."
당시 첫 출근을 해서 빠르게 반죽하는 법을 배웠다.
계량컵의 중간까지 뜨거운 물을 넣고 그 위에는 정수를 넣어 온도를 맞췄어야 했는데 오롯이 뜨거운 물만 이스트와 밀가루에 넣었던 것이다.
아뿔싸, 그렇게 반죽을 2번을 하고 났는데 프레즐을 만드는 점장님이 반죽이 죽었다고 말씀을 하는 것. 당시 뭐가 잘못된 지 모르다 점장님이 혹시 뜨거운 물만 넣었냐고 물어보시기에 그렇다고 말을 했다.
모두가 경악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죄송하다."는 사과 밖에, 그리고 아빠한테 몰래 연락해서 변상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나 매우 간 졸이며 있었다.
그렇게 2011년 현대백화점에서 가장 핫하던 브랜드 앤티앤스프레즐은,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 2시-오후 4시까지 아무런 매출을 내지 못했다.
사회인으로서의 첫 출근에서 이렇게 남에게 폐만 끼치다니, 백화점 마감시간까지는 내 마음은 바위를 겨우 견뎌내 밀어내는 시시포스처럼 형벌을 지고 있었다. 그렇게 첫 출근 날 백화점 마감시간이 되고 두 시간 동안 매출을 내지는 못했지만 평소보다 적지 않은 매출을 내기는 했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실을 끼친 건 사실이니 혼자 구석에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매출 손실액을 변상한다고 할까?' , '너무 건방져 보이려나?' , '아빠한테는 뭐라고 하지?'
그때 점장님께서 하는 말 "기 죽지 말고, 반죽 제대로 안 가르쳐준 내 잘못도 있으니까. 괜히 이것 때문에 내일부터 안 나올 생각하지 마." 이 한 마디에 시시포스가 지고 가던 큰 바위는 스스로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고, 털썩 주저앉았다. 첫 아르바이트 첫 출근 날에 겪었던 족히 10년이 다 된 기억임에도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이래서 뭐든지 '첫'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게 아닐까. 대학교를 다니면서 시간표 조정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계속 다니지는 못했지만, 사회의 첫 발을 나온 열아홉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용서를 받았다.
당시 점장님이 20대 후반, 많아야 30대 초중반이었고 지금의 내 나이였을 텐데, 가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보거나, 후임들이 처음으로 실수를 하고 혼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스무 살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중요한 일을 처음으로 실수했을 때와 그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는 시간들도 다 겪었으니까,
누구나 실수는 한다.
누군가 미처 잠그지 못했다면 첫 단추를 잘 메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