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에 체크인해서 주방에서 저녁도 만들고 왔어. 유럽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낼 호스텔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서 기분이 좋다! 가장 저렴한 방을 선택했는데도, 벙커침대가 아니라 개인침대가 있는 3인실이야. 수납공간도 엄청 많고, 테이블도 있어! 이렇게 시설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런던에서 지냈던 6인실 호스텔이랑 가격도 비슷해. 북유럽이라고 무조건 비싼 건 아닌가 봐! 아침에는 사우나도 무료로 사용가능하다네? 일찍 일어나서 이용해 보려고! TMI 하나만 더 하자면 백야 때문인지 호스텔에 있는 커튼이 아주 암막이야. 이 커튼만 있으면 낮에도 밤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숙소에 오기 전에 시내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맥너겟을 샀잖아. 맥너겟에 불닭볶음면 싸 먹으면 환상인 거 알지? 한국 가기 전에 남은 불닭볶음면을 처리해야 했거든. 그리고 러시아 횡단열차에서 샀던 인스턴트 감자퓌레도 캐리어에 있길래 같이 호스텔 주방으로 가져갔어. 호스텔 주방에 들어가니까 나 말고는 동양인 노부부가 계시더라. 불닭볶음면 만드려고 냄비에 물을 올렸는데, 인덕션을 못 켜고 있으니까 할머니께서 도와주셨어. 알고 보니 일본분이시더라고. 역시 만국공통으로 할머니들은 친절해. 나는 바로 꾸벅 인사를 하며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를 날렸어. 나 혼자 산다에서 이시언배우가 일본여행을 갔다가 '아리가또'까지만 말해서 패널들한테 혼났던 게 기억나더라고. 나는 그 영상을 보기 전까지 일본어에도 존댓말이 있는지 몰랐어. 그 영상을 안 봤으면 할머니께 '아리가또~'만 하고 끝냈을 거야... 외국인이니까 이해해 주셨겠지...?
할머니의 조력 덕분에 불닭볶음면을 완성하고, 감자퓌레에 뜨거운 물도 부웠고, 맥너겟도 데워서 완벽한 저녁식사를 완성했어. 아 그리고 햇반도 돌렸어. (그래 나 탄수화물 중독이야.) 주방 테이블 중 가장 구석에 있는 곳에 앉아 만찬을 즐기려 했는데 일본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내 옆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는 거야!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오래간만에 먹는 불닭볶음면에 정신이 팔려서 야무지게 먹었어.
내가 거의 다 먹어갈 때쯤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과일팩을 하나 주셨어. 감동받아버렸지 뭐야. 바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 박았지. 그때부터 대화가 이어졌어. 할아버지께서 영어를 잘하시더라고. 나보다 훨씬 잘하셨어. 과일을 먹으며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어. 내 또래의 딸이 3명이나 있다고 하더라. 핀란드는 자유여행으로 오신 거고 2주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신다고 했어. 이번에는 '스고이 데스네~'를 날렸지. (원나블 열심히 본 보람이 있나 봐.) 연세가 거의 70인신데 자유여행으로 북유럽을 단둘이 다니신다니. 정말 존경스러웠고, 부러웠어. 해외여행 한번 못 가보시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런가. 나는 오늘이 유럽여행의 마지막 날이고, 1달 정도 배낭여행을 했다고 말씀드리니까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스고이데스네'를 날려주셨어.
그리고 신기한 일이 있었어.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에 왔잖아. 알고 보니 할아버지도 60년~50년 전에 횡단열차를 타고 나처럼 모스크바까지 갔었다고 하더라.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역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어. 횡단열차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싣고 날랐을까? 각자 다른 시간에 같은 횡단열차를 탄 우리가 헬싱키에서 만난 것도 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밤이야. 백야여서 더 그랬던 걸까? 친절하고 반가웠던 일본인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는 그 후로 몇 번이나 '스고이데스네'와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를 연거푸 반복하고 헤어졌어. 나는 이제 친구를 만나러 나가봐야 하거든. 아까 파리공항에서 만난 '조던'이랑 펍에 가기로 했어! 낯선 사람이라서 조금 무섭기도 한데, 대학원생 신분인 것도 확실하고 오늘은 백야라서 어둡지도 않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유럽에서 마지막 밤... 좀 기대된다... 다음 편지에서 마저 적을게!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