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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Jun 22. 2023

내 몸이 사라졌다

feat. J.S.Bach,Six Suites for Solo Cello

 무료한 휴일.

 넷플릭스에 들어가 서치를 하다가 ‘내 몸이 사라졌다’라는 신기한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발견했다.

 첫 장면에서부터 ‘씽(아담스 패밀리에 나오는 손 뭔가?)’이 자신의 사라진 몸을 찾아 달려간다. 엽기적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진행되는데,  첼리스트인 엄마의 연주 장면이 흑백으로 인서트된다. 그의 엄마는 어린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바흐의 무반주첼로 모음곡 중 4번 E flat major 1악장을 연습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엄마가 연주하는 회상장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고, 후반부에 주인공이 녹음기를 틀 때 엄마의 첼로 연주 소리가 아주 잠깐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뒤에 영화 내내 이 음악이 흘렀던 것으로 생각했다.) 어린 주인공은 엄마를 놀래키고 이내 까르르 웃음소리, 아빠의 즐거운 기타소리. 마치 부드러운 물결이 은모래 사이로 스며드는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해가 좋은 어느 휴일 오전에서 오후에서 넘어가려는 시간, 아무도 없는 집에서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책을 보다가 문득 열린 창문을 바라본다. 파란 하늘과 그 아래 키 큰 플라타너스가 서로 이파리를 사각사각 문지르며 에메랄드 바다 속 수초처럼 흔들린다. 딱 이 곡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다.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모든 바흐를 사랑하지만 특히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모든 1악장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G major와 E flat major를 가장 좋아한다. 이 곡들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내 몸이 사라져도 모를 것이다. 다른 것을 하던 중이거나 길을 걷다가도 이 곡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몸이 멈춘다. 마치 ‘총’맞은 것처럼 아니 '뽕'맞은 것처럼?  음악은 뇌에 마약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길 하면 아주 음악에 조예가 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음치에 박치이며 악보를 읽을 줄도 잘 모른다. 공교육이 전부다. 음악을 100점 만점에 50점 정도 받았다. 심지어 피아노도 칠 줄 모른다. 그 당시 웬만해선 주산학원, 피아노학원은 다녔는데 우리 집은 참으로 웬만하지 못했다. 집에 낡은 클래식 레코드 세트가 있어서 가끔 LP의 찌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듣긴 했지만 LP플레이어는 바늘이 자주 사라졌다.  소개팅 때 상대가 베토벤 ‘운명’의 첫 소절이 문 두드리는 소리라고 했을 때. 내 운명에는 문이 없네,하고 웃었었다. 한마디로 음악에는 ‘무뢰한’이었달까.


그날.

집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밥상을 차리지 않아 더 좋았다. 점심으로 라면 한 젓가락 후후 불어 후루룩 입에 넣는 순간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가래떡처럼  굵고 묵직한 ‘솔’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눈높이 수학은 새천년의...어쩌고'하는 여자 성우의 멘트 위로 ‘시’와 ‘레’가 켜켜이 쌓여 흐르더니 갈색 모노륨이 깔린 거실에 가득 차올라 ‘파#’이 부드럽게 떨며 무너져 내렸다. 그 짧은 광고 동안, 나는 라면을 식히는 입김에  부서지고 날려 오선지 위 '솔'자리에서 살포시 흔들리다가, 갑자기 광고가 넘어가면서 덜익은 노른자처럼 톡 터졌다.

얼른 화면 모서리에 적혀있던 글자의 잔상을 더듬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G major 프렐류드.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왜 그런 무모한 결심을 했을까? 피아노도 못치는 주제에.)


  언젠가 저 곡을 반드시 연주할거야.



월급을 쪼개서 지인을 통해 저렴한 연습용 첼로를 샀다. 첼로를 들고 다니려니 차가 필요해서 운전면허증을 따고 차를 샀다. 하지만 일 년 정도 배웠을 때 레슨선생님이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다시 배울 곳을 찾기 어려웠다. 직장에 살림에 육아에 좀처럼 나만을 위한 시간을 낼 엄두가 안 났다. 그러던 중 아이를 데리고 간 문화센터에서  첼로모양 손잡이가 달린 운명의 문을 발견했다.  

 토요일 저녁 한 시간.  아이를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이동시간까지 포함해 2시간.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고 문화센터에서 첼로를 배우고 있다.

 

 아무리 바이올린보다 쉽다지만 미도, 파도 구분 못하는 '무뢰한'인 주제에 겨우 일주일에 한 시간, 초딩들과 복작이는 문화센터 강의실에서 5, 10분 레슨을 받아본들 '짜다리' 실력이 늘겠는가?

...싶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맞을 때도 있다.  (아, '태산'은 취소. '동산'쯤으로 하겠다.)

커다란 악기를 끌어안고 낑낑 거리며 일주일에 한 시간을 연습한다.

같은 문화센터에 친해진 아줌마랑 함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도 가입하고 새로운 곡들을 배우고,  합도 맞춰본다. 어느새 자라 더이상 시어머니가 없어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아이를 떼어놓고 시원한 맥주로 실수투성이 연주를 복기하며 토요일 밤을 마무리하면 가끔 '이대로 좋다'라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 중 한 시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자 '내'가 사라지는 시간.

중력에 굴복하는 매일매일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잠시 땅에서 발을 떼고 달나라에 놀러 갈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羿)가 구해준 불사약이 없어도, 옥토끼의 절구질에 박자는 못 맞추더라도 나의 그림자와 함께 빛나는 어둠 속에서 춤추는 것.


  이제 새삼스레 돌아보니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첼로를 했다. 솔찬히 돈도 많이 썼다.

이 정도 구력이면 예술의 전당에서 리사이틀이라도 한 번 해야 하는데 .... 하, 실력이 미천하다.

무거운 첼로를 낑낑거리며 들고 가서는 박자 놓치고 음정 틀리고... '이게 무슨 짓인가' 자괴감이 든다. 남들은 얼마 안 해도 샥샥 잘 해내는데 나는 이게 왤케 안 되는지. 그러면 연습이라도 많이 해야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연습도 바쁘면 빼먹기 일쑤. 방음이 안되는 집에선 첼로를 꺼내기도 무섭다.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핑계도 많을까.

아직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집은 앞부분 몇 장만 새카맣다. 누가 들을까 무서운 연주다.

하지만 잘해야만 할 수 있다면 도대체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니.

어쨌든 첼로를 부둥켜안고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용을 쓴다. 그냥 하는 거지.

'고블린 모드'를 고수하겠다. 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하는 이 마음이니까.






애니  ‘내 몸이 사라졌다’ 의  ‘씽(잘린 손)’은 천신만고 간난신고를 겪은 뒤에 자기 몸을 찾아낸다. 그러나 이미 잘린 손은 다시 붙을 수 없다. 당연하다.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으니. 주인공은 어느 정도 자신의 잘못이 원인이 된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꿈과 미래를 잃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오해를 받고 일터에서 절단기에 손을 잘린다. 그의 인생은, 잘린 오른손은 바닥 없는 나락을 더듬으며 기어온 것이다.  

눈내리는 날 밤, 아파 누워만 있던 그는 눈 쌓인 폐건물 옥상에 올라간다.

그는 사라졌다.




그는 어떻게 되었게? 스포하고 싶네. 스포해야지.


여자는 사라진 그를 찾아 폐건물 옥상에 올라간다. 차가운 눈 위엔 그의 마지막이 담긴 녹음기만 남아있다. 여자는 남겨진 녹음기의 찌직거리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그의 행복했던 유년을 지나, 그가 사라진 그날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눈을 밟으며 건물 난간에 올라가는 발소리, 유리병이 넘어져 구르는 소리, 흔들리는 마이크에 담은 겨울바람 소리,  그가 눈 위를 탁탁탁... 뛰어서. 난간을 박차는 소리.옥상에서 떨어지는 소리.

아니, 힘껏 도약하는 소리.

 건너편 크레인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미친 짓'을 해야한다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래서, 도약을 한 것이다. 실패한 인생을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잘린 ‘손’이 아니라 그 ‘미친 도전’이었던 거다. 크레인 위에서 그가 세상을 향해 크게 웃는 소리가 하얀 눈으로 내린다.


원하는 대로의 삶만 사는 인간이 있을까.

신도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 인간을 봐라. 신의 뜻대로 하는 인간이 있는지.

과거란 실수와 좌절이 얽힌, 간혹 성공과 희망이 옷핀처럼 꽂혀있는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그 실을 도로 풀어서 다시 감을 순 없다. 알렉산더처럼 과감하게  칼을 뽑아 잘라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실을 잣아야한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하는 것은 물레를 돌리는 것이다. 한 손이 남아 있는 한.


그래서 나는 첼로를 처음인 것처럼  계속하고, 나와 당신은 실패했고 또 실패하겠지만 미친 척 계속되는 삶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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