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만날 동료, 상사, 그리고 후배에게도 그의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뒤끝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은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감정"이란다. 5년째 나는 뒤끝 있게 일하고 있다.
대출업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신규, 연장 그리고 사후관리다. 신규는 대출을 새로 심사하고, 내보내는 것, 연장은 기존에 있는 대출의 기한을 늘리는 것이다. 사후관리는 이미 나간 대출에 문제가 생기거나, 이미나간 대출들에 대해 본점이나 금감원에서 자료를 요구하면 제출하는 것 등등. 물론 그 외 번거롭고, 성가시고, 해도 티가 안나는 일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일반적으로 3월 중순(혹은 빨라도 3월 초)쯤 돼야 4월 연장 리스트를 만드는데, 뒤끝 있는 나는 4월 연장리스트를 2월 중순에 만든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선배들에게 미리 뿌려준다. 그리고는 만기일 딱 한 달 전부터 미리미리 고객들에게 전화를 한다. 스팸인 줄 알고 전화를 안 받는다면? 고객님께 "ㅇㅇ은행입니다. 대출 연장건으로 전화드렸습니다. 전화부탁드립니다. 123-456- 7890" 하고 문자도 남긴다.
항상 나와 일하는 선배들이 물었다.
"ㅇㅇ아, 고맙긴 한데... 너는 만기리스트를 왜 이렇게 빨리 만드는 거야?"
이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은행에 들어와 1월, 처음으로 개인대출 연장을 맡았다. 아마 1월 중후반부터 국시(의사자격시험) 합격자 발표가 나는 듯했고, 1월부터 3월 연장까지 국시에 합격하여 갓 일하기 시작한 인턴, 레지던트 등의 대출 연장이 몰려있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들이 제일 힘들고, 가장 바쁘기에, 내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문자를 해도 응답이 없었다. 간신히 전화를 받아도, "바빠요" "이따 전화하세요". 대출 만기 이틀 전에야 연락이 와서 "연장해야 하는데요?"
어언 두 달을 그들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 그렇게 질질 끌려 다니다 보니, 정작 다른 대출 연장 건들 연락이 늦어졌다.
50대 중반 아저씨의 마이너스 통장 3백만 원 만기 일주일 전, 대출 조건 위반으로 전액 상환을 해야 했다.
"마이너스 통장 연장건으로 전화드렸는데요. 이거 ~~~ 를 이행해주지 않으셔서 연장이 힘드세요."
"아니 만기 일주일 전에 전화해서 삼백만 원을 갚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나와!!! 어디서 나오냐고!!!"
"아, 네...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삼백만 원이 어딨 냐고!!! 은행이 말이야 갑자기 전화하면 어떻게 해 미리미리 연락을 해야지 미리미리"
그렇다. 그는 본인이 대출 조건을 위반을 반년 전부터 했음에도, 대출을 안 갚고 버팅기다가, 만기 일주일 전에 대출을 갚으라고 전화했다는 이유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분명 반년 전부터 내내 본인이 계약위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은 것이다.
"반년 전부터 조건 위반이셨잖아요!!!" 하고, 약정서를 들이밀면서, 행표(은행 로고가 있는 뱃지/요즘은 잘 안 낌)와 명찰 떼고 붙으면 내가 이길것 같긴한데, 고객은 승부의 대상이 아니니까.
여하튼 연장이 안 되는 대출이라, 연체는 할 수 없으니 크나큰 삼백만 원은 어디서 인지 구해서 대출은 갚으셨다.
내 머리에 딱 두 개가 남았다. "미리미리" "큰돈 삼백"
삼백은 물론 가치 있는 돈이지만, "큰돈 삼백"이라는 아저씨의 외침은 이 글을 쓰면서나 다시 한번 떠올랐고, 지난 5년 간 3백의 가치는 크게 하락했다.
하지만 "미리미리"는 달랐다. 난 그 아저씨의 "미리미리 연락해야지 미리미리"는 오 년째 내 머리에 둥둥거린다.
"미리미리" 연장 리스트를 만들고, "미리미리" 전화를 드리고, 문자를 남긴다. 내 문자와 연락을 내내 안 받다가 만기 2-3일 전에야 연락이 온 고객들에게 대출금 일부 상환을 안내하면서, "그래서 제가 '미리미리' 연락을 드린 건데요. 제가 처음 연락을 드린 게... 2월 15일이었는데, 오늘이 3월 10일이네요."하고 미리미리의 벽을 세운다. 나는 일단 "미리미리"의 벽 안에서 안전한 것이다.
"ㅇㅇ아, 고맙긴 한데... 너는 만기리스트를 왜 이렇게 빨리 만드는 거야?"
"저 신입 때 어떤 아저씨가 마이너스 삼백만 원 갚으라는 연락을 일주일 전에 했다고, 미리미리 연락 안 했다고 어찌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지 귀청 나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래요."
나에게 저 질문을 한 수많은 선배들, 상사들에게 아저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행을 그만둘 때까지 할 것이다. 앞으로 만날 동료, 선배에게도, 내 아래에서 일할 후배들에게도. 나는 뒤끝이 매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