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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론빵 Mar 23. 2021

나와는 어떤 상사가 최악이었을까?

[스스로 인터뷰: 직장 편]




2015년에 ‘회사 상사와 부하직원의 궁합 표’가 많은 직장인들에게 회자된 적이 있다. 원작자는 전천일이라는 사람으로, 당시까지는 광고사에 근무하는 (너무나 센스 있어 지금쯤 광고 하나 성공했을 것이 분명한) 직장인이었다. 이 시절 나는 일명 ‘두기’라는 상사 아래에서 쬐끔 고생하고 있었는데, 같은 팀이었던 선배 언니랑 이 궁합 표를 보며 두기두밥이 멍게인지 멍부인지를 논하며 깔깔거렸던 기억이 있다. 두기는 그처럼 나에게 확실히 좋은 상사는 아니었다. 사실은 너무너무 싫었고, 한때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릴 정도로 큰 시련을 주기도 했다.


나쁜 상사에 대해서 이렇게 열심히 기록을 남긴다는 게 참 웃기다. 얼마나 나빴었는지 정리해봤자 나에게 좋을 게 뭐가 있을라고. 그런데 다 지난 과거로 남겨놓고 돌이켜보는 이 순간, 한 번 짚고 넘어가 보고 싶은 부분은 있다. 두기가 어땠길래, 나의 어떤 부분과 맞지 않았길래 나는 그를 최악의 상사로 꼽았을까 하는 점이다.


솔직히 S사 시절에 두기만 나빴던 건 아니다. 두기두밥과 나름 쌍벽을 이뤘던 쫑 팀장은 쌍욕과 상대를 향한 멸시가 일상이었고, 저녁 9시부터 상쾌하게(누가 보면 아침인 줄) 회의를 시작하는가 하면, 가끔 무언가에 감동해 드라마 주인공처럼 과감한 액션으로 물건을 던져 보인다거나, 오전에 사장님 보고를 다녀온 후 시원하게 까인 자료를 갈기갈기 찢어 화려하게 폭죽 쏘기를 선사해 주기도 했던 ‘위대한 쇼맨’ 같은 분이셨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남은 기억에는 ‘쫑 팀장은 뭐. 견딜만했어. 상황이 재밌기까지 할 때도 있었고(진심).’ 수준으로 아름답게 미화되어 있다.


근데 두기는 꽤 오랜 기간, 더 이상 그에게 압박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됐을 때까지도 내 마음을 슬프게 했다. 이제서야 그 이유를 정리해보면, 누구에게나 건들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는데 그게 나는 프라이버시였고, 두기는 나의 존중되어야 마땅할 그 영역에 많이 침범해 왔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프라이버시를 침범당하는 것 그리고 침범하는 것에 대해 혐오를 느낀다.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그랬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고 친한 친구더라도 그 친구의 집안 사정이나 민감한 사생활을 먼저 물은 적도, 궁금해하려고 한 적도 없다. 친함과 막역함의 기준은 상대적이니까, 이런 성격이 내 인생이나 인간관계에서 크게 문제 될 일도 없었다.


그런데 두기두밥의 아래에서는 꽤 힘들었다. 주말에 뭐 했는지, 어디 갔었는지를 매주 대답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본인을 빼고 선배 언니나 대리님이랑 커피 마시러 가는 걸 못마땅해하는 것까지도 괜찮았다. 또한, 근무 중에 두기의 시야 안에 그가 의도하지 않은 사람과 그의 사전 허락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됐을 때 흔들리는 동공으로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는 것도, 대화가 끝난 후 그 사람과는 무슨 이유로 그곳에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해명해야 하는 것도 다 견딜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나의 상사라는 이유로 내 새벽 출장길의 안전을 위해야 한다며 굳이 우리 집 주소를 물어 새벽 3시 반에 안산에서 영등포까지 데리러 와짐을 당해야 했을 때(법카 쓰는 거 바라지도 않아.. 그냥 내 돈으로 택시 타게 해 줘), 그가 나의 상사이기 때문에 업무 중 화장실을 갈 때도 본인에게 얘기를 하고 가줬으면 좋겠다고 요구당해야 했을 때(왜. 그냥 같이 따라 들어가지)와 같이 개인의 영역으로 존중받아야 할 부분을 침범당했을 때는 좀 힘들더라. 상사라는 명목 하에 거침없이 침탈하는 것 같아 괴로웠고, 자율성을 잃었다고 느낄 때면 안 보이는 실로 묶인 꼭두각시가 된 것 같아 많이 굴욕적이었다. 그가 멍부였든 멍게였든, 심지어 똑부나 똑게 상사였다 하더라도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해 정신에 상처를 준 괴로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악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머지않아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고, 나와는 더 이상 관련이 없게 되었을 때 내가 이직하게 됐는데,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묻더라.


“쫑 팀장 때문이니? 쫑 팀장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던 거야?”







... 새끼야 니가 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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