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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verselow May 20. 2021

망한 시험에 대한 단상

의식의 흐름


전공 시험을 망쳤다.


  20년을 살면서 수백 번의 시험을 봤고 그 중 유의미하게 많은 시험들을 망쳐 봤기에 이젠 딱히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상보다 못한 결과를 받아들 때의 그 허무함과 상실감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다. 내 노력의 가치를 싸그리 부정당하는 것 같은 그 느낌. 솔직히 최선을 다하진 않았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저 결과를 알게 된 이후에 생기는 사후확증편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항상 시험 결과를 받아들기 이전의 나는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나 자신을 믿고 나의 역량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다 한 번 실수할 수도 있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거야, 라고 다소 습관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실수를 하지 않고 나무에서 떨어지지도 않는 동료들의 존재가 시험을 망칠 때마다 잠깐이나마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물론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나도 그런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존재이기에 나 또한 시선이 자꾸만 위로 향한다. 내가 올려다보는 그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이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무에서 떨어져본 적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유추하기는 싫은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으로 나와 그들을 비교한다. 간신히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원숭이가 되어 날다람쥐 마냥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여기서 절대 "나는 왜 저렇게 될 수 없을까?",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안 좋은 걸까?"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내가 항상 거기서 생각의 스위치를 꺼버리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너무 자주 망한 나머지 망할 때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버리면 나 자신을 정말로 밑바닥까지 갉아먹게 될 것임을 알아서였을까? 이유야 어쨌든 간에 멘탈 관리로 딱히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분명히 이득인 듯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팔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반응속도가 빨라질지. 그리고 다시 기약 없는 나무 타기 연습을 시작한다. 다음 번에는 '운빨을 잘 타서' 절대 떨어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무렇게나 뛰어다녀도 떨어지지 않는 '재능충'이 되겠다는 다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비현실적이니까. 평범한 무리 사이에서 떨어진 횟수가 조금 더 적은 원숭이가 되겠다고 현실적으로 생각할 뿐이다. 아직은 꿈이 많을 나이지만 그렇다 해도 허무맹랑한 꿈을 꾸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다.


  시험을 망칠 때마다 내 생각은 흐르고 흘러서 항상 하나의 섬에 도달한다. 그 섬은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이 와보았던 곳이다. 모래 위에는 "다음에 잘하면 돼"라고 쓰여 있다. 바닷가 백사장에 쓴 글씨는 파도에 쓸려 나가지만 이 글씨는 특이하게도 파도가 치든 말든 그곳에 계속 남아 있다. 정말로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믿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믿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다음에 잘하면 돼" 대신 "다음에도 망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한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니까 말이다.


  여기까지 쓴 내용을 쭉 훑어본다. 써놓고 보니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대로 지워버리기는 아깝다고 생각한다. 다 됐고 그냥 공부나 하자고 생각하면서 대충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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