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nverselow May 13. 2021

설명사용설명서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는 설명문이 정보를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글이라고 배웠지만, 설명이라는 실제적인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일방적이지가 않다. 설명의 본질은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설명해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한다. 첫째, 내가 그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둘째,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어떤 점이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헤아리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상대방이 나의 설명을 듣기를 원하고 있는지.


  특히 세 번째 조건과 관련해서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설명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있다. "설명충".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대꾸한다. "안물안궁".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고 말이다. 그런 사람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설명을 듣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짜증이 올라온다. 쓸데없이 아는 척하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고 변명을 하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지만 들을수록 피곤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설명충이 되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설명을 아끼는 것은 과연 우월전략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가 느끼기에는 불필요한 설명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꼭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케이스는 설명충이 되는 케이스보다 내막이 조금 더 복잡하다. 설명충은 순전히 상대방이 설명을 듣기를 원하는지 고려하지 않아서 설명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설명을 생략해버리는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상대방의 입장을 나름대로 고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말을 하다 말아버리는 "생략충"(당연히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일 것이다. 내가 만든 말이니까.)이 되어버리는 것은 매한가지겠지만.


  생략충이 어떤 사람을 일컫는 말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다음 예시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친구로부터 언제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 여러 번 왔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만 답했다. 나 이번 달에는 만날 시간이 안 돼. 그런데 사실 나는 뒤에 하고 싶었던 말이 더 있었다. O요일, O요일과 O요일에 고정된 스케줄이 있는데 그거 피해서 약속을 잡느라 X월 X째주까지 일정이 꽉 차버렸어, 라는 말. 딱히 급한 약속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상대방이 나에게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어올 때마다 그 말을 과감히 생략해버렸다.


  그러한 대화가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나는 내 의도와는 달리 어느새 그 친구와 만나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어볼 때마다 만날 시간이 없다고는 하는데 왜 시간이 없는지, 언제부터 시간이 날 것 같은지 똑바로 설명해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쌓이고 쌓인 상대방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원래 하려다가 말았던 말보다 훨씬 더 길게 변명을 해야만 했다. 나 자신의 생략충 자아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 해프닝이었다고나 할까.


  정리해 보자면 설명을 해도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고, 설명을 안 해도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야말로 가불기 상태인 것이다. 토론하는 것도 아니고 설명을 하는 것일 뿐인데 굳이 이것저것 재고 따지면서 매 순간 할지 말지를 판단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하느냐고? 아마도 그래야만 하는 모양이다. 결국 설명 또한 눈치의 영역에 속하는 행위인 셈이니까.


친절함과 수다스러움, 간결함과 불친절함의 차이는 겨우 종이  장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을 한다는 것은  설명충과 생략충,  사이 어디쯤에서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도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먼지 쌓인 스피커에 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