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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verselow Aug 13. 2021

이사


  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 8년 동안이나 살았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편으로는 들뜨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에 이사를 할 때처럼 마음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사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는 과정이 상당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새로운 게 마냥 좋은 것, 신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만한 나이가 되어서 그랬던 걸까.


  이사를 하기 며칠 전부터 내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평소에 방 청소를 거의 하지 않는다. 나름의 결벽증같은 것이 있어서 꺼낸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다시 가져다놓아야 하고,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은 반드시 각을 맞춰서 정리해두어야 한다는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방 안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을—그것이 필요한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내 방은 청소가 필요할 정도로 어질러질 일이 거의 없었고, 방 청소는 아무리 이사를 앞둔 시점이었다고 해도 나에게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방을 치우다 보니 이런 게 내 방에 있었나 싶은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수시로 튀어나왔다. 고등학교 때 쓰다가 버리는 것을 깜빡한 교과서, 중학교 때 썼던 미술 스케치북, 그리고 심지어는 초등학교 때 썼던 그림일기같은 것들 말이다. 어딘가에 파묻혀 있겠거니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것들이 수 년의 세월을 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궁금한 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나는 그런 물건들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하나 모두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과거의 어느 하루를 살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학을 앞두고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느라 글씨를 마구 날려 써도 크게 개의치 않던 나, 만화 그리기를 좋아해서 종이만 있으면 캐릭터 그리기 연습을 하던 나, 라면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신라면 봉지를 보고 정물화를 그리던 나, 갱지로 된 영어 문법 프린트가 닳을 때까지 보고 또 보던 나, 중국어가 익숙지 않아서 한자가 외워질 때까지 몇십 번이고 반복해서 쓰면서 연습하던 나, 그리고 수업시간에 졸면서 이른바 "휴먼졸림체" 필기를 구사하던 나까지. 내 방에 겹겹이 쌓여있던 것은 비단 먼지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방을 온전히 혼자 쓰게 된 이후로 방 안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이 세월의 더께를 이루며 그곳에 쌓여 있었다.


  이사는 모두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에 해당한다. 사는 곳을 옮긴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새 출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는 새 출발과 동시에 과거의 무언가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사를 앞두고 집을 청소하다가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은 오래 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찾기를 포기했던 물건일 수도 있고, 어렴풋이 생각나는 과거의 추억일 수도 있다. 새 집에서 보내게 될 미래의 시간 또한 더욱더 먼 미래에는 과거로 바뀌어 이사할 때 재발견되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이사만큼이나 미래지향적인 동시에 과거지향적인 무언가가 또 있을까? 어쩌면 이사가 매번 귀찮으면서도 묘하게 설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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