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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우 Feb 19. 2019

의지의화가 서비홍

철수의그림이야기

  






오늘 소개할 화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의지’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굳건한 의지로 중국예술의 발전과 성공에 큰 공헌을 해내었다. 평생 중국예술과 중국인민들을 위해 봉사한 중국근현대미술의 빼놓을수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화가의 이름은 서비홍이다.

     

     

서비홍은 1895년 강소성 어느 한 가난한 화가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가 아버지 밑에서 전통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가장으로서 8명의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그의 강한 의지와 책임감은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된것이었다.

1915년 서비홍은 상해로 건너가 일과 그림공부, 프랑스어 공부를 겸하며 힘들지만 보람찬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는 늘 ‘의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천재와 보통 사람의 차이는 백지 한장 차이만 못하다. 문제는 누가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늘 그렇게 삶을 살아냈다.  열심히 한 결과 그에게 프랑스 유학의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그가 유학하던 파리국립미술학교는 엄격한 소묘 기초 훈련을 강조했다. 국내에 있을 때부터 ‘소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그는, 학교의 정규수업외에도 스스로 복습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혼자 실물을 보고 사생했으며, 많은 소묘 습작들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그 특징을 잘 기억했다가 다시 한번 그려보는 방식으로 원작과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고 재수정에 들어갔다.

     

     

8년이라는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육가로서 후진양성에 힘써 매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창작활동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비홍선생은 늘 예술로써 고통받는 중국인민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그리고 당시 국민당의 횡포에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국민당의 독재에 대한 풍자를 나타낸 그림을 그렸다.

     

     

     


《전횡오백사》



     

     

이 그림은《전횡오백사》라는 작품이다.  진나라 말기 진승-오광이 일으킨 전국적인 농민봉기의 풍파속에서, 제나라의 후손인 전횡이 농민들을 거느리고 진에 대항하여 투쟁한 이야기다.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전횡은 다른 사람의 지휘아래있기 싫어 5백여 명의 전우들과 함께 외딴섬에가서 살았다. 유방은 전횡이 항복하면 나머지 500명의 부하를 살려준다고 약조했고, 전횡은 유방을 만나러 떠났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굴복하기 싫어 스스로 목을베어버렸다.  유방은 부하를 보내 섬에 있는 5백여 명의 전사들을 항복시키려고 했으나, 전횡이 이미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들은 한 명도 빠짐 없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서비홍은 이 그림을 통해 국민당의 독재통치와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성을 은유적으로 고발하고자 한것이었다. 화가자신도 전횡처럼 독재자에게 굴복할지언정 죽음을 선택할만큼 국민당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하고 있다는 뜻도 드러내려 한 것이었다.

     

     

     

1938년 서비홍은 인도의 저명한 시인 타고르의 초청으로 인도국제대학에 가서 강의할 기회가 생겼다. 서비홍은 특별히 많은 작품을 챙겨, 가는 길에 홍콩 싱가포르 스리랑카 등지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해외 중국인들은 앞다투어 서비홍의 작품을 구매했으며, 그는 그림을 팔아 모은 10만 달러의 거금을 모두 중국으로 송금해 어려운 난민들을 도왔다.

     

     

     

《우공이산》

     

     

이 작품은《우공이산》이라는 작품이다. 1940년 서비홍은 인도의 다르질링에서 대형 인물화인 이 작품을 제작한다. 당시 국내에서는 인민들이 힘겹게 항일전쟁을 하고 있었다.  화가가 이러한 제재를 바탕으로 한 의미는, 우공이 산을 옮긴것처럼 중국 사람의 힘은 무궁무진하여 큰 산도 옮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항일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보여주려 한것이었다. 서비홍 회화의 특성은 언제나 중국과 서양의 특징을 융합시키는 데 있다. 우공이산에는 전통적 몰골법, 선묘법, 훈염법등과 서양화의 명암법이 서로 융합되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주제외에도 서비홍은 다른 주제 또한 즐겨그렸다. '말' 은 서비홍이 가장 즐겨 그린 또 다른 소재다. 그는 종종 말을 통해 자신의 비애나 우울함, 희망과 기쁨을 표현했다. 서비홍은 평생 동안 말을 그렸고, 또한 평생 동안 말을 관찰했다. 일찍이 프랑스 유학 시절, 그는 자주 말 훈련장으로 가서 천여 장이 넘는 말 크로키화를 그렸다. 그는 또 말의 해부학적인 면과 말의 기질을 자세히 연구했다. 인도 여행시 서비홍은 말을 타고 장거리를 자주 다녔는데, 여기서 그는 말의 건장함과 용감성, 충실성에 깊이 매료되었다. 서비홍이 말을 그리는 방식은 기존의 그림과는 조금 달랐다. 발묵과 사의 혹은 사의와 기교를 겸한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천리마 형상을 그렸다.

     

서비홍이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화가의 강한의지가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아니라, 후학양성과 중국인민들을 위해 발휘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195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나라일에 앞장을 선 애국자였다. 누구나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끝까지 실천해나가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화가 서비홍은 자신의 강한의지를 그대로 실천해내고 살아낸 장본인이었다. 지금까지 ‘의지’의 화가 서비홍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미지출처

-www.baiduim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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