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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우 Apr 18. 2019

장대천 이야기

<철수의 그림이야기>





오늘 소개할 화가는 중국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예술가다. 그는 또한 화가로써 화풍 탐색에 있어서도 참신하고 매력적인 방법을 꾸준히 시도했고 마침내 독창적인 화풍을 정립해 중국 근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화가의 이름은 장대천이다.


     




그는 1899년 쓰촨 성 내강이라는 곳에서 출생한다. 1907년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던 어머니를 도와 목탄으로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그는 유학의 길을 결정하게 된다. 1917년 그는 일본 교토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회화와 염색공예를 배우기 시작한다.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친 그는 1919년 귀국해 상해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국 서화예술작품을 집중적으로 창작에 임한다. 1940년~1943년은 장대천이 중국 북부에 위치한 돈 황벽 굴 사원으로 가 임모 작업을 하는 시기다. 1950년 그는 먼 땅 인도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기회와 더불어 그는 인도 아잔타 석굴 벽화 임모 및 둔황 벽화와 비교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1960년 이후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긴 시간 동안 창작에만 전념한다.

1978년 그는 조국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어 대만 타이베이로 이주한다. 고국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그는 1983년 타이베이의 집에서 세상을 뜬다.

     





그의 예술 생애를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키워드는 ‘몽환적 색채’ 다. 장대천 회화예술은 크게 3분기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시기는 60세 이전까지 고전 대가들의 작품을 임모 하던 시기로 본다. 이 시기에 화가는 석도, 팔대산인 등의 청나라 화가의 작품을 즐겨 그렸다. 그 외에도 불교벽화가 가득한 둔황에 가서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임모를 했다. 두 번째 시기는 60세에서 70세까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발채 법과 발묵, 준법 등을 섞어 쓰는 회화의 실험기로 볼 수 있겠다. 이 시기에는 장대천 특유의 산수화에 몽환적 색채가 곁들여진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70세 이후 타계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전성기로 본다.

     

     


화가는 색채를 참 잘 썼다. 초기의 작품을 보면 독특하고도 강렬한 색채를 살펴볼 수 있다. 화가가 즐겨 그린 꽃 작품들을 살펴보자. 이 화조화 연작들은 화가의 독특한 색채 기법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여기 이 꽃잎들은 같은 색임에도 다른 색조로 입체감이 드러난다. 화가는 다양한 색채를 자세하고도 정밀하게 표현해냈다. 이번에는 발묵 법으로 표현한 꽃이다. 연잎을 거침없이 먹을 이용해 그려냈다. 발묵 법은 강렬하고도 신비스러운 시각적 효과를 자아낸다. 화가는 이렇듯 강렬한 색채와 발묵의 기법에 모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후기에는 이 두 가지 기법을 사용해 독특한 몽환적 색채를 완성한다.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황산’이다. 장대천은 초기에 석도와 팔대산인 등 청나라 시대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석도를 좋아했다. 석도는 여러 차례 황산에 올라 직접 보고 사생을 해서 독창적인 화풍을 찾은 화가였다.  그처럼 장대천도 자연에서 그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1927년 5월 처음으로 황산에 오른다.

     


     

     

     

황산은 중국의 이름난 명산이다. 안휘성 남부에 위치해있으며, 이름 있는 산봉우리만 70개가 넘는다. 그때 당시 황산에 오른다는 건 지금 케이블카를 타고 단숨에 오를 수 있는 것 과는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이 과정을 이겨내고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황산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는 황산에서 몇 개월을 지내며 사생을 했다. 장대천은 황산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의 다양한 변주를 열심히 담아냈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용법으로 산수화를 그렸다. 산수화는 전통적으로 수묵으로 그린 수묵산수화와 청록색의 안료와 붉으스름하고 신비스러운 색채를 띄는 금벽 산수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장대천은 두 가지 장르를 조화롭게 섞어 새로운 맛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거기에 추상적인 발채 법을 더해 몽환적 효과를 내었다. 황산은 장대천 산수화의 중요한 예술적 원천지였다고 할 수 있다.

     



장대천은 또한 중국 문화예술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 북부에 위치한 둔황 벽화를 손수 임모 해내었다. 바로 세 번째는 키워드 ‘둔황 벽화’ 다. 막고굴이라고도 불리는 돈 황벽 굴은 절벽에 건축되었으며 남북 길이가 대략 1628m이고 5백여 개의 동굴로 배열되어있다. 돈 황벽 굴은 4세기 중국 전진 시대부터 약 1,000년 동안의 역사가 한 곳에 모여있는 중국 불교문화의 보고다. 각 왕조마다 미적 취향이 달랐고 불화에도 이 차이점들이 적극 반영되었다. 그래서 이곳의 장점은 한 장소에 1000년이라는 역사의 변주를 한 번에 파노라마처럼 쭉 훑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장대천이 둔황에 이르렀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부서져나간 절벽과 모래로 뒤덮인 황량한 모습뿐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중일전쟁 및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내전으로 중국 문화재 보호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노골적으로 돈 황벽 굴의 문화재를 파손하고 훔쳐가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보다 못한 장대천은 1940년 둔황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는 체계적으로 동굴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모든 동굴에 일일이 통일된 번호를 달았고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의 작품을 임모 하기 시작한다. 1943년 11월 270 여폭의 벽화 임모를 가지고 쓰촨 성 성도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  그림을 살펴보자.






화가는 날아다니는 보살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먼저 화려한 장식들을 선하 나하나 공을 들여 정성스럽게 묘사해내었다. 선묘 외에도 색채 묘사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것이 보인다. 다채로운 색 묘사와 자세한 선묘 사는 단순히 전통 임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간 창작화라 해도 무색하다. 그의 작품들은 중국 인민들을 감동시켰다. 그뿐 아니라 중국화가들에게조차 생소했던 둔황 벽화들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화가 본인 또한 이 임모 과정을 통해 예술적으로 많이 성숙을 했고,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사녀화들을 많이 제작해내었다. 이 그림들을 보자. 둔황 임모의 영향으로 그의 사녀화는 신비롭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다. 구도와 사녀화의 자세가 상당히 독특하다. 기존의 전형적인 사녀 구도와는 확실한 차별점이 느껴진다.

     


     



화가는 모든 그림을 다 잘 그렸다. 그는 정치는 잘 몰랐다. 그저 예술만을 사랑했고 예술을 위해 살았다. 중국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힘써 일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중국 예술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또한 화풍에 있어서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변화를 이룩해낸 위대한 화가 장대천의 이야기였다.











 


이미지출처: Baidu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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