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의 그림이야기
제백석(1863-1957)은 중국 근현대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단연 그의 소박하면서도 재미있는 독창적인 화풍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겠지만, 그 외에도 여러 면에서 존경을 받을 이유가 있다. 그의 예술 생애를 이번 기회를 통해서 쉽고 더 깊게 알아보았으면 한다. 우선 세 가지 키워드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첫 번째 키워드는 ‘독하게 독학’이다. 그는 정식적인 회화교육이나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전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책이든, 스승이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스스로 노력했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분야에 고수의 경지에 이르고 마는 독학의 끝판왕이다. 제백석은 1863년 11월 후난 성 상담현 백석 포향이라는 아름다운 한 작은 마을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8세쯤 되었을 때 가족들은 그동안 아끼고 절약해 모은 돈으로 책, 종이, 붓등을 사주면서, 제백석을 그의 외조부가 운영하는 사숙(개인이 세운 글방)으로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가을 농작물 수확이 거의 없던 어느 가을, 생계 때문에 1년도 채 되지 못하여 제백석은 공부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목동이 되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틈만 나면 예전의 책들을 꺼내 쇠뿔 위에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 읽었다. 그림 그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금 더 나이가 들자 그는 목공이 되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허약한 체질에, 가난한 집에서 자란 제백석은 또래 아이들보다 작고 야위었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그에게 농사보다는 목공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낮에는 목공일을 했고, 저녁에 귀가해서는 그림 그리는 연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개 자원화보芥子園畫譜1,2,3,>라는 중국 전통화 교본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고 그 후 반년 간의 노력 끝에 세 권의 책을 모두 베껴 내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그는 계속해서 되풀이해 화집을 그렸다.
그는 회화 기법을 습작하는 동시에 전통적으로 축적되어 온 도장 파는 일(전각예술)에도 깊은 흥미를 가졌다. 제백석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천충산南泉沖山이라는 산에 도장을 새길 수 있는 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더위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도장 새길 돌을 두 광주리 가득 채집해 왔다. 그는 그 돌들을 갈고 새기고 또 갈고 새겼다. 집안은 온통 돌가루 천지였다. ‘쇠방망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도장 새기는 법과 도법 방면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마침내 자신만의 강렬한 대비나 독특한 화풍을 발견하며 그 일대 전각의 명인이 되었다.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대중적 정서”다. 그의 그림은 이해하기 쉽다. 가장 큰 이유로는 작품의 소재자체가 우리일상과 밀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제백석의 창작 주제는 주로 그에게 익숙한 생활 속에서 나온 것이었고, 늘 서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심지어는 일상적인 생산도구마저 작품의 소재가 되어 화면에 올려졌다. 제백석의 그림들은 늘 세속적이고 생동감 넘치며 경쾌한 분위기가 넘쳐났다. 또한 노동생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백석 만년의 작품에서는 어릴 적 자기 손으로 다루었던 것과 눈으로 직접 본 것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림속의 장작, 호미, 삼태기 등은 모두 자급자족하며 이하는 백성들의 삶을 사랑하는 작가정신의 한 표현이다.
제백석은 또 배추 그리기를 좋아한 만큼 배추를 야채 중의 왕으로 생각했다. 세밀한 관찰을 통해 배추의 크고 통통하고 하얀 속살과 푸른 잎의 특성을 살려 꽃 중의 왕인 목단, 과일 중의 왕인 여지 등에 그 아름다움을 비겼다. 어느날 꽤 이름 있는 화가가 그에게 찾아와 사사로이 어떻게 하면 배추를 잘 그릴 수 있는지 그 비법을 묻자, 제백석은 그 화가에게 “당신의 몸에는 조금도 소순기蘇洵氣(잡풀이나 야채등에서 나는 기)가 없는데 어찌 나와 똑같은 그림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겠느냐‘고 정숙하게 일깨웠다. 제백석이 말한 소순기란, 하나는 화가로서의 생활에 대한 태도와 노동인민에 대한 사상 감정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생활의 흔적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억지로 꾸며서는 진정한 작품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소순기란 바로 농민들에게서 배어나오는 향토기鄕土氣이기도 하다. 그의 소박하고 성실한 노동인민의 본색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다.
제백석은 고향의 청산녹수를 사랑했고 꽃, 새, 물고기, 벌레등도 사랑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물가에 조용히 앉아 작은 새우들의 생활 습성을 세심히 관찰하거나, 계곡에 앉아 게들이 기어다니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제백석은 특히 새우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가 새우를 그릴 때는 몇 필 정도의 움직임으로 손쉽게 그린 듯하나, 사실 그것은 수십 년간 땀흘려 쌓아 온 득도의 경지인 것이다. 제백석은 유명해진 뒤에도 늘 책상 위에 새우가 담긴 큰 사발을 놓고 새우의 생활 습성을 관찰하곤 했다. 1930년대 들어와서 제백석은 게나 새우등을 그리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 그림은 엷고도 농담의 변화가 많은 수묵운용을 주로 하고 있으며, 용필이 명료하고 필법의 변화가 다양해 새우의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생명체가 생경하고 신선하게 묘사되어 마치 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세 번째 키워드는 풍자와 유머러스함이다. 그의 작품의 주제는 소박하지만 현실과 밀접했기 때문에 중국인민들의 핍박과 부조리함을 겪는 것에 대한 풍자 또한 놓치지 않았다.제백석은 정부의 부패로 인해 좌절한 국민들을 생각하며 항상 가슴 아파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그린 <부도옹不倒翁:오뚝이> 그림은 그 형상이 독특하고 생경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림에는 오뚝이 모양을 한 밉살스런 관직의 인형이 그려져 있다. 화폭에는 시詩도 적혀 있는데 한 수는 이렇게 씌어 있다. “벼슬아치 모자에 하얀 부채는 분명 관리인데,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것은 본래 진흙이 둥글게 감싸고 있기 때문이라네. 만약 너를 갑자기 부숴 본다면, 몸 가운데 어디에 간이 붙었니?” 이렇게 그는 교묘하게 오뚝이 형상을 통해 자신의 인민에 대한 사랑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가 그린 <노자주鸕鶿舟>에는 “아름다운 강산이 산산이 부서질 때라도 가마우지는 자신의 배만 부르면 다른 것에 관심이 없다. 어부는 흥망 성쇠의 일을 모르고 취한 채 쪽배를 버드나무 가지에 매는구나”라는 시구가 있다. 항일전쟁에서 중국이 점차 승리를 얻어 갈 무렵, 일본 침략자들은 날로 몰락하고 멸망해 갔다. 이때 제백석은 <방해 螃蟹:게>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진흙 속에 빠진 게가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 쳐 보지만 점점 더 빠져 들어가고, 죽을 일만 눈앞에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거기에 “곳곳이 진흙탕인데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작년에는 게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게를 많이 볼 수 없구나”라는 시 한 편을 적어 놓았다. 그는 또 <군서도群鼠圖>라는 그림에서는 일본 침략자들을 이리저리 쫓기는 신세가 된 길거리의 쥐들로 묘사하고, 신심 가득히 이런시를 적어 놓았다. “쥐들아 쥐들아 어째서 그리 많은가? 왜 그렇게 시끄러운가? 내 과일을 갉아 먹고 또한 내 곡식을 벗겨 먹는구나. 촛불은 꺼져 가고 등불은 희미해지니 날이 밝아 오고 엄동설한은 이미 오경고로 바뀌었네.”
제백석은 처음에는 먹고 살기위해 그림을 그렸다. 생계가 그를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몰고 갔지만, 무엇보다도 그 바탕에는 어린 시절 대자연을 향한 집요한 관찰력,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본질적인 동력이였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 없이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점검하고 더 나은 예술창작을 위해 고심을 했다. 인민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국지심으로 그는 중국 미술계에 잊지못할 큰 공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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