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형태에 공동육아를 해보고 바라보며 느낀 것들...
결혼 전부터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다.
공동체 생활은 어떨까.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된다면에 맞닿은 고민이었다. 공동체보다는 공동육아에 관심이 많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신혼집을 고를 때 성미산 마을 공동체를 후보지에 넣기도 했다. 고민 끝에 부암동, 지금 동네에 자리를 잡았긴 했지만 공동 육아를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때마침 다니던 회사 과장님이 성미산 마을에 살며 두 아이를 공동체 안에 있는 대안학교에 보내셨다. 대안학교 이사이기도했고. 여러 가지를 묻고 들을 수 있었다.
대안학교에 대해 "일반 초등학교 과정에 대안학교 프로그램이 많이 적용되어 이제는 굳이 대안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다", "아이가 판검사나 의사 등 제도권에 전문직을 하고 싶어 한다면, 대안학교를 다녀서 갈 수 없다", "어떤 아이가 의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대안학교 중학교를 다니다 일반학교로 넘어갔다" 등의 조언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요즘 방독면을 쓰고 학교에 가더라", "윤리 교육이 특히 달라. 이상만 말하지 않아, 현실에 기반을 두고 말하고 행동하지. 있는 그대로. 대안학교를 다니다가 일반학교를 가게 되면 윤리적인 부분에서 아이들이 혼란을 많이 느낀다고 하더군" "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느 녀석은 벌써 영화 현장판에 들어갔어. 그거 하고 싶데. 마침 학부형이 영화감독이라 따라다니며 배우고 있다더군"
과장님이 가끔 툭툭 던지는 이런 말은 학교 다니며 답답함을 느꼈던 나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아이가 기어 다닐 때쯤 공동육아가 절실했다. 주변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었고, 아이가 집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내가 고립되어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다.
우리 동네 지역 특성상 기어 다닐 시기에 놀 마땅한 실내 놀이터가 없고, 그나마 하나 있는 놀이터도 청운동 산 꼭대기에 있었다. 큰 빌딩도 없고, 마트나 키즈카페도 없다. 아이 엄마를 자연스럽게 만날 공간이 없으니 엄마들을 만날 접점도 없고 지역 카페도 조용한 편이었다.
공동육아를 하자며 지역 카페에 글을 올리고, 사람을 모았다. 인구도 적고 아이가 적은 이 동네에서 그나마 다섯 사람이 모였다. 대면 모임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세 명이 모였다. 기어 다니는 아이들이라 장소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구에서 제공하는 육아센터는 동대문 근처에 있다. 차를 타고 40분 정도 나가야 있었고. 구청, 주민센터 등 대여할 수 있는 복지관이나 도서관 공간을 문의해봤지만 힘들었다. 어렵게 서촌에 한 도서관에서 아주 작은 공간을 하나 빌려주었다.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아 결국 집으로 모였는데, 동네 특성상 다른 집으로 가려면 산을 하나 혹은 두 개는 넘어야 해서 모임에 한계가 있었다. 짧게나마 아이를 함께 보는 것, 집집마다 다른 풍경을 보는 것들은 좋았지만, 초대를 하는 사람도 초대를 받는 사람도 서로가 부담스러웠다. 결국 흐지부지되고. 아이가 크고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면 인사 정도 하게 됐다.
은평구에 사는 엄마 소개로 은평구 공동육아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구 특성상 공동육아가 활발했다. 우리 동네와 분위기가 달랐다. 아이가 많은 구이다 보니 구나 보건소, 동네마다 공동육아를 지원했고 내가 참여한 공동육아는 10년째 내려오고 있었다. 이름과 공간이나 재정에 정책적 지원이 내려온 것이지 그 구성원에 자율권은 전적으로 구성원 자체에 있었다.
15명 정도 모였는데 우리는 주에 2회 정도 1-2시간 공간이 제법 넓은 복지관에 모였다. 활동 주제가 있어야 구심점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책 육아를 했다. 팀을 짜서 돌아가며 책을 읽고 책 내용으로 아이들에게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엄마가 하는 문화센터 같은 거였다.
가끔 어린이 도서연구회에 계시는 분도 초대해서 강연도 듣고, 구성원 중에 몬테소리 교사가 있어서 몬테소리 정신이나 실생활에 적용하는 방법도 들을 수 있었다. 날이 좋으면 야외로 갔다. 공원에 김밥을 사서 같이 놀기도 하고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전시나 공연에 가기도 했다.
운이 좋았다. 구성원이 좋았다. 모나는 사람 하나 없이 마음이 맞았다. 활동도 잘 돌아갔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긍정적인 육아에 원동력이 되었다. 활동이 좋아서 조리원 동기며, 병원 동기까지 불러서 인연을 계속 맺었는데 아마 그렇게 안 봤으면 중간에 그 인연들이 끊겼을 것 같다.
그런데 매년 그렇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해에는 부모들이 마음이 맞지 않아 구성원 내에 갈등이 있기도 하고 중간에 활동을 그만두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는 멀기도 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아이 두 돌 정도까지 1년 정도 활동하고 그만뒀다. 복직 등에 이유로 몇 명이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면서 또 그만두고, 모임에 반 정도가 코로나 직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모임에 남은 대다수가 5세 이전까지 공동육아 힘으로 가정보육을 했다.
어느 때보다 아이 영아 시기에 공동육아를 하면 좋겠구나 싶었다.
공동육아를 했던 구성원 중 일부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선택했다. 나 역시 동네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대기를 걸었다.
우리 지역구에는 없어서 그나마 라이딩할 수 있는 거리에 다른 구에 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2군데 신청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상담을 갔을 때마다 좋았다. 어린이집 안에 마당이 있고, 아이들은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았다. 매일 뒷산에 가서 놀고, 놀이에 자유로웠다. 아이들 표정은 밝았고, 몇 마디 대화에서 자유로움이 묻어 있었다. 부모들이 함께 활동하는 것도 좋았다. 아이들과 부모들 다 함께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같이 신청을 했지만 선착순에 밀려 다음 해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다니는 엄마들에게 어린이집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먼저 다니던 엄마들이 함께 다니던 많은 사람들과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나오게 됐다. 다니던 엄마가 들어간 시점에도 생각이 달라서 몇 가정이 나간 사연을 들었는데... 들어간 사람이 또 그 해에 나온 것이다. 들었던 이야기를 세부적으로 다 적을 수는 없지만. 그동안에 일을 들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나 역시 공동육아 어린이집 입소를 포기했다.
공동육아도 공동육아마다 다르고 구성원이 어떻게 꾸려가는 것에 따라 다 다르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고, 바라보는 시각도 주관적이다.
어린이집 규칙을 지키고 청소나 여러 행사 등 부모가 해야 할 것들은 당연히 해야 하고,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길고 긴 회의는 어려웠다. 생각이 다른데 합의를 보기 위한 과정에 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것 같았다. 나같이 에너지가 한정적이고, 양가 부모님, 친척 도울 분이 없는데 늦은 밤, 잦은 회의를 하다 보면 피곤해서 정작 내 아이에게 신경을 못 쓸 것 같았다.
대학 모임이 생각났다. 대학 신문사에서 3년을 활동했다. 할 일도 많은데 의견을 합의하고 조율한다는 명목으로 밤새 회의를 많이 했다. 사람들 생각은 생각보다 더 달라서 합의할 길이 없었다. 몇몇 합의를 본 것도 있지만 대다수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나가기도 많이 나가고 그랬던 경험이 있다.
아이를 교육하는 데는 합의해보자고 할 수 있는 지점과 아닌 지점이 있다. 이 정도가 최소한 선이지 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최소한 선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이에 안전이 더 중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공동체 자체가 중요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려오는 전통이 중요할 수 있다. 살아왔던 가치관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더 많고, 그 사람들이 운영 결정에 우위에 있다면 어린이집에 대한 아쉬움이 들 것 같다.
한 예로, 어린이집 운영을 논의하다 동성애 찬반까지 화두가 되어 몇 달을 논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생각이 다르다 보니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게 되었고. 그중 몇 가정은 생각도 다르지만 토론 도중 받은 상처로 인해 어린이집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함께 놀던 친구들도 그렇게 하루아침에 헤어져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낼까 고민했다. 그만한 어린이집이 드물기 때문이다. 참 어려운 문제였다. 남편과 상의 끝에 입소를 포기했지만 구성원에 생각이 맞거나 다름을 인정하는 성숙한 문화가 공유된다면 이상적인 어린이집이 아닌가 싶다.
그 이후에도 공동육아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같이 어린이집을 다니는 엄마가 작년에 종로구도 공동육아 지원을 한다며 한 번 해보자고 해서 했다. 한 달에 두세 번 어린이집 하원 후 한 시간 정도 모여서 활동을 했다. 코로나가 심해져서 중도에 활동을 그만뒀는데 나름 재미있게 꾸려 나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공동육아가 좀 더 현실성에 맞고 다양해졌으면 했다. 종로구는 한 달 지원비가 3만 원이었고,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우리 팀은 세 가정에 6명에 아이가 모였다. 활동하는 재료비와 다과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달 활동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보고서는 제공되는 한글 양식 보고서였고 활동했던 사진도 틀 안에 그 규격에 맞게 반듯하게 넣어야 했다. 영수증은 공무원 회계기준에 맞춰 제출해야 했다. 온라인으로 제품을 구매할 경우, 온라인 회사에 전화를 하고 여러 번 절차를 밟아 규격에 맞는 영수증을 내야 했는데 굉장히 번거로웠다.
한 달에 한두 번 교육이나 회의에도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는데 아쉬운 것이 종합지원센터 장소가 동대문 근처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안 그래도 복잡한 구간인데 중간에 율곡로 터널공사로 차도 많이 막힌다. 아이를 데리고 한 번 다녀오면 하루 일과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우리는 "그래, 지원 때문에 한다기보다는 지원을 핑계로 우리끼리 뭐라도 해보는 거죠"하는 의미로 하긴 했는데 뭔가 방향성에 아쉬움이 들었다.
공동육아를 했던 엄마들과 공동육아를 하며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는 삶에 대해 고민했다. 때마침 그런 아파트가 지어진다기에 지원을 했다.
사전 모임을 몇 번 가졌는데, 아이도 좋아하고 우리도 흡족했다. 서로에게 큰 부담을 가지지 않고, 잠깐 모여서 함께지만 각자 놀다 헤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공동체 생활에 희망과 두려움이 섞여 있다. 아이에게 언니, 오빠, 친구 다양한 관계를 맺어줄 수 있다는 것 말고도 기대가 있다. 동시에 느슨한 공동체를 추구하자고 하며 모였지만 자칫 공동체가 부담이 되거나 구성원 마음이 맞지 않아 활동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된다. 안 해보고 알 수가 없고, 일단 해본다.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