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다',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이 없어져..
서울에 와서 처음 삶의 터를 잡았던 곳이 대치동 강남 세브란스 병원 근처였다. 부산 광안리 바닷가 5분 거리에 살았던 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와 건물들 사이에서 느꼈던 감정은 복잡했다. 낯선 곳에서 삶을 정착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힘들기도 했지만,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풍경도 다르고, 길도 다르고, 사람들의 느낌도 달랐다. 낯선 길을 구경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며 처음 몇 개월은 어디 여행을 온 것처럼 지내기도 했다.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서울 생활도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이 되고 일정하게 굴러가는 삶 속에 젖어들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답답함은 이내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높은 빌딩 숲 어디선가 길을 잃은 사람 같았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완벽하게 설계된 공간에 꾸역꾸역 몸을 욱여넣고 하루하루를 어찌 보내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방인이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채로운 것을 보고 느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밀려오는 공허함도 커져갔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디로든 탁 트인 곳을 가고 싶었다. ‘아, 이래서 서울 사람들이 바다 바다 하는구나’ 이해가 갔다. 바다 앞에 살았지만 바다가 거기 있었을 뿐, 자주 가지도 않았었는데... 바다가 그리워졌다. 그렇게 찾은 곳이 양재천이다.
집에서 가깝고, 한적했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보장됐다. 높은 빌딩 숲을 거닐고 있으면 '여기가 서울이구나'하고 체감으로 와닿는 게 사람과의 간격이다. 인구밀도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출퇴근길에 지옥철을 타고 있으면 나의 인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혹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고 있나’ 이런 생각이 막 밀려올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양재천만 와도 어느 정도 사람다움을 지키며 사람과의 간격을 두고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천 길 따라 난 산책로도 괜찮지만 강변을 따라 조성된 좁은 숲길이 참 좋았다. 긴 산책로를 걷다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지친 서울 생활에 상기되어 있는 마음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시간만 나면 양재천으로 달려갔던 것 같다.
그러다 부암동에 왔을 때는 '여기도 서울인가? 서울에 이런 곳도 있구나' 했다. 같은 서울이지만, 부암동은 대치동과는 결이 다른 공간이었다. 높은 빌딩 숲 사이에서 외롭고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편리한 인프라에 젖어 있던 대치동의 삶에서 마트 하나 없는 이런 동네가 괜찮을까. 걱정과 달리, 부암동은 꽤 괜찮았다. 남편이 부암동에 자리 잡자며 설득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창 밖만 봐도 느낄 수 있는 온전한 쉼,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음식점들에서 느끼는 정취,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골목길만 걸어도 느낄 수 있는 즐거움. 대치동에서 느낄 수 없었던 뭐 이런 것들이 있었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산책로는 한적하고 고즈넉했고, 산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골목길은 가지각색의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암동에다 살고 있는 인구는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적어 서로의 인간다움을 지키기에 사람간의 간격이 적정했다. 외지인이 와도 동네 자체가 사람이 많이 담아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주말에도 한적한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든 길들은 이어져 있었다. 천을 따라 단선으로 이어져 있던 양재천과는 다른 재미였다. 세검정 쪽으로 돌아가도 산을 넘어 건너오면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 있었고, 윤동주 문학관을 끼고 산을 넘어 걸어가도 어디든 갈 길이 있었다. 무무대를 지나면 사직동이 나왔고, 청운공원 옆 산길로 내려가면 서촌이 나왔다. 길 건너 산을 넘으면 백사실 계곡에 갈 수 있었다. 상명대 꼭대기며 능금마을까지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던 것 같다. 게다가 신혼 아닌가. 각자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부암동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며 집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모르던 미술관이나 유적지를 찾는 것도 즐거웠다. 곳곳에 숨겨진 가게에 들어가 음식을 사 먹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은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대치동에 살았던 집의 창문 밖은 다른 건물이 보여 시야가 막혀 있었고, 다른 편은 차도가 보였었다. 창문 밖으로 하늘이 보이고 산 능선에 아기자기한 집들을 보는 풍경만으로 마음이 이렇게 편할 줄은 몰랐다. 하루 종일 도심을 누비며 마음을 부대끼다가도 거실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지러웠던 소리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는 했다. ‘아, 집이다’ 바닥에 내 몸을 맡기고 누워버리는 순간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답답하다’ ‘탈출하고 싶다’, ‘어디 탁 트인 데 가고 싶다’, ‘여행을 가고 싶다’ 이런 말들이 없어졌다, 그냥 이 공간으로 충분했고 집에 들어와 창문 밖 풍경을 보고 있으면 진정 쉬는 것 같았다. 여행이 딱히 필요 없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조용하고 하늘이 보이는 집에 앉아 자주 멍을 때릴 수도 있었고, 넋 놓고 그저 창 밖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어도 시간이 잘 갔다. 누워도 하늘이 보이고 앉아도 하늘이 보이고, 뒤를 돌아봐도 산과 하늘이 보였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해서 살아가는 일상만으로 삶이 달리 보일 수 있구나 했다.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이렇게도 큰지 잘 몰랐다. 직접 겪어보며 느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삶의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이 바뀌었을 뿐인데, 마음의 여유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