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인철 Jan 18. 2021

번아웃 증후군

월요일이다.

"시간은 영원의 형상이며, 또한 영원의 대용품이다." -시몬 베이유-



뭐라고 불러도 좋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죽기보다 싫다. 정확히는 출근해야 하는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죽도록 싫다.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현대사회의 무수한 장점 중 하나는 예전엔 알 수 없었던 병명을 아주 빠르게 찾아내 자가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쩌면 내가 겪고 있는 건 ‘번아웃 증후군’ 일지도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에 앞서 인터넷 관련 기사에 내 상황을 끼워 맞춰 보며 ‘음. 역시 그랬네."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직장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면 다섯 중 둘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자가진단'을 내렸으리라. 


시간은 절대적이며 공평해 보이지만 그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주말 아침의 숙취와 주중 아침에 감당해야 할 숙취가 다르듯, 주말 아침 7시와 주중 아침 7시, 그 둘 사이의 시간의 흐름 속도는 너무나 다르다. 

서른 살 전까지의 시간은 새로웠다. 

시원한 바람, 눅눅한 바람, 노을 진 하늘, 황사 낀 하늘은 새로웠다. 시내를 걸어도, 담배를 피워도, 술을 마시고 막차를 놓쳐도, 2호선 순환선 첫차를 타고 그 자리에 잠들어 몇 바퀴를 돌아도, 여자 친구에게 차여 멍청한 짓을 해도 모든 것은 새로웠다. 새로워서 즐거웠다. 

새로운 시간의 물결 안에서 새로운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깨끗한 시간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샘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은 느리고 천천히 흐르지만 의미로 가득 차 있다.


느림과 지겨움은 다르다.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낡은 시간도 천천히 느리게 흐르지만 의미가 적다. 의미가 없는 시간은 압축된다. 그래서 짧아진다. 새로운 시간은 절대 압축할 수 없다. 

지나간 시간은 진공 포장되어 기억이라는 상자에 완충제와 함께 포장된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만 기억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그 상자의 존재 자체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난 미혼에 자녀도 없어서 인지 몰라도 장수의 욕망을 덧없이 여기지만 현대의 의학기술은 나의 숨통을 붙자고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끔찍하다. 

(어쩌면) 머지않아 나의 기억 속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 치매. 끔찍한 얘기지만 난 고스톱도 칠 줄 모를뿐더러 기억력 도움이 되는 걸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난 음주를 너무나 좋아한다.

시간이 직선으로 전진하는 직선운동을 하는지 원형 운동을 하는지와 관계없이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을 뿐이다. 과거는 지나가 버렸고 잡을 수 없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부분적으로나마 남게 된다.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져 사지가 마비되지만 그의 기억력은 엄청나다. 그는 지나간 하루를 기억하는데 하루를 온전히 소비한다.

나는 지나간 하루를 기억하는데 30초 정도를 소비하며 그다음 날이 되어서는 30초를 소비해 기억한 그 날을 10초를 사용해 기억한다. 그리고 5초. 1초. 0. 그렇게 내가 살았던 현재는 어떤 곳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나의 과거가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나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내 삶은 나에게서 없는 것이며 결국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러다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유년시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경험했듯 자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본인의 유년시절은 부모님이나 조부모에 의해서 듣게 되며 우리는 그것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살아본다.

그렇다. 기억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기억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함께 나눠진 것이며 공유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단절된 시간 속에서 단절된 경험만을 한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비참한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거의 확신하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이불을 덮은 채로 오늘과 비슷한 끔찍한 기분으로 번아웃 증후군이네 뭐네 꿍시렁대며 억지로 일어날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단지 회사에서의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똥덩어리의 연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