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꼴라이 고골, <검찰관>
세계문학전집에 한번, 길고 긴 러시아 이름에 또 한번 헉했으나 막상 읽어보니 제법 재밌게 읽을 수 있었고, 진짜 허들은 본문이 끝나고 이어지는 길고 어려운 해설이었다.
< 등장인물 >
시민들 삥뜯는 시장
편지 훔쳐읽는 우체국장
사람들을 되려 빨리 죽이는 병원장
뇌물 받는 판사
그리고 무전취식하며 검찰관인 척하는 도박꾼 흘레스따꼬프.
해설에서 이 작품에 선한 사람이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되짚어보니 정말 그렇다. 시민들까지도 선량한 존재가 아니다. 공사비를 부풀리고 자재를 바꿔치기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진짜 검찰관’은 선한 존재일까? 그도 그리 기대되지 않는 것이, 독자도 권선징악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까이 여길 ‘선’이 없으므로. 그가 공정한 심판자라면 모두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할 뿐이다.
검찰관이 온다는 소문을 듣자 마을의 권력자들은 각자의 구역에서 횡행하던 악한 일들을 어떻게든 덮으려고 모의한다.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게 검찰관이 온다면 어떨까, 낯선 느낌이 아니다. 예수가 다시 오실 때는 심판하러 오신다는 사실이 내게 검찰관의 방문과 비슷하다. 옳지 않음을 알지만 덮어두고 자행하고 있는 악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이야기와 달리 그때 방문할 검찰관은 악을 내버려 두지 않는 공정한 심판자일 것이므로 늦지 않게 태도를 고쳐먹어야 하겠지.
악이 팽배한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 새상은 다 거지같아, 하고 그냥 살아가야 할까. 선하고자 애써도 본래 모두가 악하고 상대적으로 덜 악하거나 더 악할 뿐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 푸시식 모두 놓아 버리는 게 속 편하다 싶다. 그럼에도, 공명정대한 심판자 앞에 섰을 때 결백을 주장할 수는 없더라도 정상참작을 요청할 수는 있지 않을까.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행동을 통해서.
그나저나 나쁜 놈들만 판치는 희곡을 읽어도 교훈적으로 끝나는 쪽글은 어쩔 꺼여… 생긴대로 살아야지 뭐…